대만 한달살이 : 월병과 유자
오늘은 한국도 대만도 추석(대만은 중추절)이야. 외국에서 명절을 홀로 보내긴 처음이네. 여느 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시작한 하루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폭염 속에서도 왠지 모를 썰렁함이 느껴지는 거 있지. 매일 가는 요가원도 쉬어서 꼭 밖을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어. 몸은 더워서 쳐지고 마음은 추워서 경직되는 게 명절 탓이다 싶더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그날에 나는 작은 방에 누워서 배고픔이 나를 이길 때까지 꼼짝 않고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어. 왜 사람들은 명절 따위를 만들어서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툴툴거리면서 말이야.
그때 한국에서 연락이 왔어. 몇 년 전부터 우리 집에서도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는데 명절 기분은 내고 싶어서 몇 가지 음식을 했다더라고. 전화기를 타고 엄마 음식 냄새가 내 콧끝에 맺히는 듯했어. 먹고 싶어 순간 눈코입 제각각에 물이 고였지. 예고도 없던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그제야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오전 내내 홀로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는 걸 알겠더라. 집 나가면 개고생인데 무슨 부기영화를 누리겠다고 명절에 나라 밖으로 나가 혼자서 울고 있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 곧 몰아칠지도 모를 엄마 잔소리는 맞닥뜨리면 수습이 안 될 것 같았어. 그래서 나는 일부러 명절 기념으로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거 사 먹을 거라고 허풍을 떤 후 급하게 전화를 끊었어.
임기응변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긴 했지만 맞는 말 같았어. 쉽게 경험하기 힘든 대만 명절이잖아. 우울만 하다가 끝내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대만 중추절 음식을 AI에게 물어보니 대만 사람들은 꼭 바비큐, 월병, 유자는 먹는다 했어. 그래서 나도 송편 대신 소박하게 월병 맛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밖을 나왔지. 때를 맞춰 배에서도 더 크게 꼬르륵 소리가 났어. 명절에 배고픈 것만큼 서러운 게 어디 있겠어. 나는 기죽기 싫어 월병과 유자뿐만 아니라 먹고 싶은 거 다 사자며 두 번째 허풍을 떨었어. 다행히 내 발걸음도 마트에 가까워질수록 가벼워지더라.
중추절에 월병을 먹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단합하기 위함이라 했어. 유자를 그 뒤에 먹으면 소화를 도와줘서 몸을 보호할 수 있다 했지. 재미로 월병만 사려다 이왕 따라 하는 거 다 해보자 싶어 옆에 있는 유자도 같이 사기로 했어. 문제는 마트에서 실제로 본 유자가 생각보다 훨씬 맛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어. 우중충한 색에 울퉁불퉁한 표면까지 더해져 사고 싶은 게 없더라고. 한참을 고민만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현지인이 내가 딱해 보였는지 나 대신 괜찮은 유자 하나를 골라주셨어. 중국어로 설명하시는 부분은 다 생략하고 표정으로 보이는 마음만 듬뿍 받았지. 작은 도움으로 텅 비었던 마음도 꽉 차는 듯했어.
"谢谢(씨에씨에) 감사합니다"
나는 제법 입에 익은 중국어 인사말을 했어. 대만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일본어"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아리가토 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가 자꾸 튀어나와 애를 먹었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해결이 되더라고. 간단한 중국말이었지만 웬만하면 현지 음식, 언어, 풍습을 따르고 싶은 내 마음을 담았어. 잘은 몰라도 어설프나마 대만의 명절 음식을 사려고 노력하던 내 모습에 그 의도가 조금은 보였을 거라 기대해. 우여곡절 끝에 다른 먹거리와 함께 월병과 유자를 장바구니에 담았어. 푸짐한 게 명절 기분이 제법 나더라. 흥이 오른 나는 숙소로 돌아오며 역시 명절이 좋긴 좋다며 혼자서 중얼거렸어. 명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오전엔 나쁜 놈으로 오후에는 좋은 놈으로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
손바닥 3분의 2 정도 크기의 월병을 조금씩 베어 먹었어. 단 것을 안 좋아하는 편이라 누가 옆에 있었다면 반은 떼어주었을 텐데 혼자 다 먹으니 입이 달달해 일탈하는 기분이 들더라고. 살살 잘 녹여 먹으며 앞으로 일 년간 주변 사람들과 무탈하게 보내게 도와달라며 빌었어. 유자는 내 두 주먹을 합쳐 놓은 정도로 컸어. 대만 사람들은 월병과 유자를 연속해서 먹는다 했으니 이왕 따라 하는 거 나도 똑같이 해 봐야지 싶었지. 새콤한 유자는 단맛으로 끈적거리던 입속을 시원하게 해 줬어. 그리 맛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둘의 궁합은 괜찮다 싶더라. 월병도 유자도 천천히 먹었어. 작은 음식으로 나의 중추절이 제법 중추절답게 지나가고 있는 듯해 만족스러웠어.
집 나와 내 마음대로 떠돌아다녀도 인생은 그리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은 듯해. 하루는 대만에 오길 잘했다 싶다가 다음 날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리니 말이야. 그래서 오락가락하는 마음보다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살려고. 생각에 맞추며 살다간 꼼짝도 못 하고 책상 앞에서 세상 근심 다 끌어안고 시간만 죽일 테니까. 행동 먼저 하다 보면 하루가 가고 그러다 보면 그간 쌓였던 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잖아. 대만의 중추절은 한국의 추석보다는 단출한 것 같아. 떠들썩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덕분에 나는 덜 외롭게 그리고 조촐하지만 그들을 따라 명절을 쇨 수 있었어. 앞으로 남은 대만살이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중추절만 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