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폰에 저장된 정기 이름은 ‘물음표 살인마’. 5년 동안 한 번도 안 바꿨다. 정기는 모든 말을 의문형으로 말한다.
배가 고프면 ‘배고프지 않아?’
졸리면 ‘나만 졸려?’
데이트하고 싶으면 ‘주말에 어디 나갈까?’
... 한 번을! 단 한 번을! 먼저 나를 이끌어주는 적이 없지, 아주!
언어습관이 인간관계의 기틀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언어습관 탓을 하고 싶은 걸까. 어찌 됐든 우리 사이의 권력 구도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정기는 질문하는 사람, 나는 대답하는 사람.
정기는 허락 맡는 사람, 나는 허락하는 사람.
정기는 물어보는 사람, 나는 알려주는 사람.
정기는 따라오는 사람, 나는 끌고 가는 사람.
새벽 3시 반에 퇴근해서 씻고 누우니 새벽 4시. 화형식을 진행한 듯 후끈한 난방 텐트 안에 들어가니 정기가 털후리스를 입고 이불도 두 겹이나 겹쳐서 자고 있다.
아 맞아, 생각해보니까 오늘 아침 잠결에 정기가 몸이 안 좋다는 소리를 한 것 같기도 해. 그 옆에 조용히 누워서 쓰라려오는 마음을 꾹꾹 눌러 뭉쳤다.
요새 우리는 서로의 자는 얼굴만 봤지. 정기가 출근할 때 나는 자고 있고, 내가 퇴근할 때 정기가 자고 있다. 이렇게 아파하는데 나는 몰랐네. 정기야, 얼른 나아라. 내일이면 괜찮을 거지. 너 운동선수잖아. 그럼 남들보다 회복력 하나는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러면서 겨우 잠에 들었는데, 이상한 소리에 곧 눈을 다시 떴다.
아침 8시. 학... 학... 학...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나는 지금 너무 졸린데. 나, 더 자고 싶은데. 못 들은 척할까.
못 들은 척하고 잠들면 없던 일이 되어있을 수도 있잖아. 학... 학... 학... 내 머리채를 쥐어서 끌고가는 잠결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채 난방텐트를 나왔다. 정기가 내는 소리였다.
학... 학... 학... 정기가 샤워는 어찌저찌 마치고 옷도 어찌저찌 주워입고 양말을 신으려다가 만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학... 학... 학... 의식은 있는데 숨도 못 쉬고 눈도 잘 못 뜬다. 너 왜 그래? 얼마나 아파? 왜? 어디가 어떻게 아파? 언제부터 이래? 분명히 물음표 살인마는 정기인데, 질문은 내가 제일 많이 하고 있고 정작 정기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다.
출근 못 하겠는데. 정기야 너 출근 못 하겠다. 내가 전화해놓을게. 정기가 일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 정기가 아파서 출근을 못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치 학교 선생님한테 우리 애가 오늘 아파서 등교를 못 할 것 같아요 하듯이. 그랬더니 정말 정기가 내 아들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돌아왔는데 정기가 그 사이에 양말을 다 신었다. 출근 해야된단다. 그 몸으로 어떻게 출근을 해. 돈 벌어야 한단다. 하루 일당 정도 까여도 돼. 안 된대. 이번 달에 빨간 날이 있었어서 큰 몫 한 번 빠졌고, 곧 대회가 있어서 며칠 또 빠져야 돼서 오늘까지 빠지면 우리 못 산대. 그걸 들으니 할 말이 없다. 정기가 이렇게 아픈데, 나도 멈칫하게 된다. 내가 분명히 지금 이 타이밍에 참나! 오늘 하루 쉬어! 내가 있잖아! 해야 되는데, 그래야 되는 걸 아는데 어라 말이 안 나간다.
나는 돈 대신 경험과 경력을 쌓고 있는 거야.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얻고 있는 거지. 잠시 돈 못 버는 거? 그래도 돼. 이건 손해가 아니야. 분명히 앞으로 나에게 더 큰 걸 가져다줄 거야. 울컥울컥 불안할 때마다 자기 최면하던 말들, 최면의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통장 잔고를 계속 계속 확인하게 되면서 나를 달래고 힘을 주던 맘속 메아리들이 하나씩 숨을 죽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안에 단단한 봉우리들이 무너졌나 보다. 내 안에는 이제 지지대가 없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불안한 미래를 믿고 계속 정진해? 그러다 죽도 밥도 안 되면? 메추리알 만한 월급 넘어봤자 비둘기알 정도에서 그치는 거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끌고 와서 돈 벌어? 그러다가 평생 이 일 저 일만 하면서 사는 삶만 살게 되면 어떻게 해? 몰라, 모르겠다. 정기보다 내가 더 아픈 것 같아. 진짜 그런 것 같아,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정기를 봤다.
아; 정기 미안; 확실히 너가 더 아프구나;;;
눈물이 쭈룩쭈룩 난다. 내가 돈을 못 벌어서 미안해. 아픈데도 출근할 생각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오늘 푹 쉬고, 내일은 꼭 출근하자. 내일은 출근 해야 돼. 이런 말해서 미안해. 정기를 꼭 껴안고 얼굴을 부비는데, 정기가 너무 뜨겁다. 이럴 시간이 없네. 병원을 가야 한다.
정기를 둘러업다시피 해서 일요일에도 여는 병원을 데리고 갔다. 수액을 네 개나 맞추고, 죽을 사고, 입맛 돋게 할 달달상큼한 것도 사고 나니 두 시간 새에 20만 원을 훌쩍 썼다.
정기를 옆에 태우고 집으로 가는 길. 옆에서 정기가 뭐라뭐라 말한다.
어제 내가 점심 거르고 병원에 갔다? 의사가 뭐라는지 알아? 독감이랑 코로나 검사해보시겠어요? 얼마였게? 6만원! 근데 음성인 거야? 내가 뭐 검사 하고 싶었는 줄 알아? 하, 죽은 언제 먹지? 저 병원 리뷰에는 간호사 불친절하다는데, 친절하던데 그치? 나온 김에 마시 사료 사가야 되는 거 아니야? 마시 지금 뭐할까? 오늘 할 일 많아? 전기장판 틀어놓고 나왔는데 불 안 나겠지?
정기는 다시 물음표 살인마로 돌아왔다. 휘유 다행이다. 혼자 아프면 서럽다는데 자기는 하나도 안 서럽다면서 재연이가 없었으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고 하는 정기. 내가 너한테 힘이 되는구나. 휘유 다행이다. 내가 당분간은 돈을 못 벌어올 것 같거든. 그래도 힘이 돼? 힘이 된대. 휘유 다행.
돈은 너가 더 많이 벌어오지만 넌 아파도 돈 벌러 나가야 하지만, 집안일도 뭔가 너가 좀 더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너는 질문하는 사람, 허락 맡는 사람, 물어보는 사람, 따라오는 사람하고, 나는 대답하는 사람, 허락하는 사람, 알려주는 사람, 끌고 가는 사람 시켜줄 거야?
시켜줄 거래.
그래. 그러면 됐다.
다 무너져서 평지였던 내 맘에 오늘 봉우리 한 개가 조금 아주 조금 볼록 올라왔다. 그렇게 하나씩 조금씩 세워나가야지. 정기가 세워줄 거야. 정기가 내 맘을 다시 빽빽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나는 정기 없으면 안 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