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지블루 1

by 고니크

메리지블루의 대표적인 증상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이거 혹시 메리지블루인가요?”하고 묻게 된다는 것이다. 왜인지 자가진단이 절대 안 되는 질환인 것이다.


그래서 물어볼게요.

이거 혹시 메리지블루인가요?


저는 분명히 정기를 사랑하는데, 정기와 평생 함께할 건데,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요. 근데 왜 계속 평생 함께해도 되나 의문이 드는 걸까요? 메리지블루란 자아가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을 뜻하는 거였나요? 아무래도 지금 나는 자아가 두 가지로 나눠진 상태다. 정기를 사랑하고 정기를 미워한다. 정기와 결혼하고 싶고 정기와 파혼하고 싶다. 정기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고 정기를 영원히 보기 싫다. 정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인데, 나만 변했다. 내 마음에 마구니가 끼어들어 온 것이다.


메리지블루의 첫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오랜만에 내 요리 솜씨를 발휘한 날. 냉장고에 있던 당근, 양배추, 브로콜리, 버섯, 닭가슴살, 애호박을 꺼내 세상 화려한 카레를 한 대접 끓였다.

자! 먹어 봐! 어때! 맛있지!

정기는 이삿짐 사다리 밑을 지나가는 사람의 동작으로 카레에서 버섯과 닭가슴살만 쏙 뽑아 입으로 가져갔다.

아, 맞다. 정기는 채소 안 먹지.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에서 내 뇌가 작동을 멈췄으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근데 내 뇌는 다음 프로세스로 작업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서 만든 건데 어떻게 한 입도 먹지 않아?


그래 뭐, 여기까지는 얼핏 가사 노동을 한 자의 귀여운 투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근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내 뇌는 다음 작업으로 돌입했다.


이렇게 채소를 안 먹는 아빠 밑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고 키우라는 거야? 채소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애 앞에서 맨날 채소 에퉤퉤하면서 뱉어내는 모습을 보이면 그 애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는 거지? 정기는 내 애가 보고 배울만한 아버지상이 맞긴 한가?


그때부터였다. 내 맘속에서 정기를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갈등 상황에서 주눅든 태도를 보이는 정기. 예전엔 분명 저 모습이 귀여웠는데 이제는 저래서 어떻게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맛집 화장실이 더러워서 가기 싫다는 내 말에 “절이 싫으면 중으로 가라!”고 말하는 정기. 어라 분명히 내가 웃겨하는 정기의 백치미 포인트인데, 이제는 내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이해시킬 수 있는 재목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정기가 내 말을 잘 들으면 정기의 가장 자질을 의심하고, 내 말을 안 들으면 아버지의 자질을 의심한다. 이건 정말 이상한 감정이다. 나는 여전히 분명하게 정기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정기와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확신은 점점 잃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됐다.

나는 애인으로서의 정기를 사랑할 뿐이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정기, 아버지로서의 정기를 사랑하는 건 아닌가 보다.


자, 그렇다면 이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정기와는 평생 사귀기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이 여기까지 번졌으면 이제부터 메리지블루의 2단계 증상이 나타난다.


메리지블루의 2단계 증상.

상대방이 이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리기. 정기는 변했다. 예전의 정기는 나를 계란후라이 위의 노른자를 다루듯 했었는데. 내가 터지지 않게 나를 지켜줬는데. 이제는 변한 것 같다.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아니?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참 이상한 일이다. 정기를 내 맘대로 재단하고 계산하고 있는 건 난데, 내 뇌는 어쩐지 정기의 마음이 변했다고 결론을 지어버린다.


그래야 내 맘이 편해서겠지. 안다. 나는 셀피쉬걸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메리지블루 중이라고.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예전의 정기와 지금의 정기의 차이점을 매의 눈으로 찾아낸다. 예전의 정기한테 ‘고재연으로 삼행시 해줘’하면 정기는 ‘고, 고재연. 재, 재연아. 연, 연나게 사랑한다!’고 해줬다. 근데 이제는 ‘고, 고재연. 재, 재연아. 연, 연날리기.’라고 한다고. 변했어.


너 이제 나 안 사랑하지.

예전에는 내가 인스타에 올리는 글 하나하나 다 읽었으면서 이제는 내가 뭘 올리듯 그게 세 줄이 넘어가면 읽지 않는다. 저번에는 내 스토리를 보지도 않고 바로 스와이프해서 넘기는 모습까지 목격했다고. 어떻게 내 글을, 내 하루를, 내 감정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있어? 어떻게 안 들여다볼 수가 있냐고.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폰부터 꺼낸다. 각자 폰만 계속 보고 있다가 밥이 나오면 먹고, 계산하고, 나온다. 너 혹시 2인분 시키고 싶어서 나랑 밥 먹으러 온 거니?


생각해 보니 “이제 뭐하지?”라는 말도 늘었다. 이제 뭐하긴 뭘 뭐해. 우리가 왜 할 게 없어. 다음에 할 거를 왜 고민해야 돼. 우린 손만 잡고 아무렇게나 걸어도 시간이 훌쩍 갔던 사이잖아! 그래 확실해. 정기는 변했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해도 되는 것일까? 암담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다. 끝없는 우울이 찾아온다. 하루종일 정기의 약점과 단점을 꼽아보며 이게 맞나? 내 세대는 120살까지 산다는데 남은 86년을 저 사람과 살아도 되나? 인생의 큰 결정을 이렇게 쉽게 해버려도 돼?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결정해도 되는 사안인 거냐고. 나중에 사랑이 끝나면? 만약 내 사랑이 한 80살 쯤 끝나면 나머지 40년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잠깐 결혼은 어떨 때 결심하는 거였지?

사랑 말고 이 결혼이 맞는지 시비를 확인해볼 수 있는 다른 지표는 없나?

제발요. 누가 좀 알려주세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간이다. 메리지블루 3단계.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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