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지블루 2

by 고니크

메리지블루 3단계는 정말 악독하다.


이제 나는 정기가 밉다.

이렇게 된 나는 그동안 사귀면서 정기가 나한테 했던 모든 실수와 잘못들을 끌어온다. 그래 넌 그런 애였지. 너 그때 나한테 그랬잖아. 그러면 안 됐어. 오호라,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넌.


연애 초 정기는 나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 선한 성품이 장점인 정기는 선한 성품이라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5년 전 정기는 어렸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선했다. 너무 선한 나머지 할 말을 해야 할 때를 몰랐고, 할 말을 해야 할 대상을 제대로 결정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선 넘는 사람들에게 여기까지는 넘어오면 안 되지 일러주지도 못했다. 정기가 있는 단톡방에서, 정기가 있는 식사 자리에서, 운동 시간에, 노는 시간에 정기의 선을 아무렇게나 넘는 사람들에게 허허허 웃기만 했던 정기. 마음이 다칠 때마다 나에게 와서 미주알고주알 상처를 풀어냈던 정기. 나한테만 와서 눈물짓고 힘들어하는 정기. 미주알고주알 모든 말을 전달하는 바람에 내 선도 헝크러졌다는 걸 모르는 정기. 받아온 만큼 나에게도 깊숙한 상처를 음각하는 정기. 내 상처보다 자기 상처가 더 아픈 정기. “내 인간관계 너 때문에 망쳐지면, 모든 걸 다 관두고 울산으로 내려갈 거야.” 내 입을 꾹 닫아버린 정기.


그 말이 내게 여전히 남아 그 일에 대해선 지금도 모호하고 애매하게만 쓰게 되는 나. 정기를 상처주지만 정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 입은 빈틈없이 잠겼다. 내 상처는 이제 말로도 글로도 제대로 풀 수가 없게 되었다고. 메리지블루 3단계가 온 나는 그 옛날 상처를 문득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정기가 나한테 이렇게 했어. 앞으로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그때처럼 똑같이 굴겠지. 만약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 우리 아이라면? 아이의 입도 잠그는 거 아닐까? 안 돼. 안 돼!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았다.

메리지블루 3단계의 정점에 온 것이다.


4단계는 없다.

모든 질병은 죽지 않으면 치유된다. 나는 죽지 않았다.

이제는 치유의 길로 들어설 시간.


생각이 끝까지 번지면 반작용으로 오히려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잠만, 나 지금 너무 과한 것 같은데?


핑크다이어리를 꺼내 본다. 나 지금 혹시 PMS인가? 젠장. 생리 23일 남았잖아. 졸라 많이 남았네. 그래. PMS 탓은 아니고.


가만가만 생각 좀 해보자.

다행히도 나에겐 자정 기능이라는 게 있다. 다른 사람들도 갖고 태어나는 기능인지는 몰라. 나는 갖고 태어났다. 혼탁한 어항을 필터가 싹 걸러주듯이, 정신에 노폐물이 포화상태로 차면 그제야 내 뇌는 필터 기능 ON을 누른다. 점점 제정신이 돌아온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돼. 노트를 펴서 가장 맨 위에 적어놓은 글을 읽는다. 언젠가 인터넷 속에서 본 말이다.

[스트레스 상황에 자주 노출되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온다. 몸은 그 호르몬을 중화하기 위해 그 반대인 도파민 호르몬도 같이 내뿜게 되는데, 이것이 반복되면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도파민에 중독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나 아냐? 지금 나 이러고 있는 것 같기도? 도파민이 필요해서 불행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낸 거라면? 맞는 것 같아. 내가 정기를 사랑하면서도 정기를 미워할 이유가 이거 말고는 없잖아. 정말 도무지 없다.


결혼 준비 기간은 불안하고 힘들고 또 지루하다. 그래 나는 도파민이 필요했던 걸 수도 있겠어. 안간힘을 써서 정기를 나쁘게 보고, 억지로 정기를 미워하면서 내가 원했던 건 도파민이었던 거야. 불행해야 나오는 거 말고, 정기가 주는 도파민. 정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도파민. 근데 정기가 안 주니까 너무 무서운 방식을 선택하게 된 거야. 그래, 이거다!


내가 일부러 나를 코르티솔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는,

그래서 그 보상으로 분출될 도파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출근길. 비를 추적추적 맞으며 결연하게 전화를 걸었다.


- 자기, 나 사랑해?

"응."


- 사랑한다는 확신이 있어?

"응. ...내가 서툴러서 미안해."


울컥.


- 나때문에 가족관계가 다 망쳐지고 친구관계가 다 망쳐지고 인생도 망가지고 결국에 남는 건 나 하나밖에 없어져도?

"...뭐. 자기가 남으면 다 남은 거지."


울컥22.


정기에게 지금 이 울렁이는 마음을 전해야겠다.

나는 어렵게 입을 뗐다.


- ...정기야...

"응."


- 택배 왔대.

"정리할게."


응. 그래 내 입에서는 여기서 더 뭐가 나오진 않는군. 그래서 글로 쓴다. 나 혼자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며 그 통행 과정 중 정기의 머리채를 여러 번 잡아 흔들었지만, 정기는 머리가 빠지든 말든 그대로였다. 정기는 부처인가? 이미 대머리여서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야?

내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몸담을 곳을 고민하며 히스테릭을 부리고 있었을 때 정기는 해탈과 돈오, 점수, 무념무상의 수양을 이미 끝마쳤던 거다. 아~ 우리 종교가 달랐던 거구나. 내가 천국에 올라가고 있을 때 너는 열반에 올랐구나. 좋은 건가? 좋지만 그래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정기야 안 돼. 불교에서 빠져나와. 불교는 집착하면 안된대. 너는 나한테 집착해야 돼. 공수레공수거 싫어. 나를 놓으면서 빈손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저그홀드 잡듯이 나만은 꽉 쥐어야 돼. 알았지, 꼭.


나도 이제 천국에도 올라가지 않고 지옥에도 내려가지 않을게. 어디도 가지 말고 너한테 갈게. 눈 흘기고 눈물 흘리는 시간 속에서 나는 정기의 단점을 서른마흔다섯 가지 정도 꼽아냈다. 나와 다른 점을 하나하나 헤아릴 땐, 그게 다 헤어질 충분조건이었는데 결국 나는 헤어지지 못한다. 겨우 한 가지의 장점 때문에.

정기의 겨우 한 가지 장점.


[정기는 서른마흔다섯 가지의 지점에서 나와 너무 다르다.]


정기는 여전히 세 줄이 넘어가는 내 글은 읽지 않고, 심지어 메리지블루랑 멜란지블루가 뭐가 다른 거냐고 묻기도 하지만, 나는 전처럼 화가 나진 않는다. 나는 백기 들었다. 하얀 수건도 던졌다. (얼굴 쪽으로 세게 던진 것 같기는 한데.)


그래 너는 너다. 멜란지블루 아니 ... 이씨... 메리지블루 끝에서 깨달은 건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내 메리지블루가 끝났다. 요란하고 혼란했던 시간. 정기를 미워하는 나를 미워했지만 결국 이 모든 건 사랑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사랑은 너무 무서워. 이 무서운 걸 내가 하고 있다니. 심지어 오래 하고 싶다니. 정말 무섭다, 무서워.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나는 자기반성이 취미라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이점 참고해주셔라... 메리지블루를 겪고 있는 분들이 반드시 아셔야 할 것이 있다. 우울한 것은 본인의 탓이 아님!! 절대 아님!! 그러니까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 된 건 정기 탓도 당연히 있거등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날 좀 사랑해 달라는 말이었는데, 정기는 매번 한숨만 쉬었으니까. 어렵게 말하면 못 알아듣고 쉽게 말하면 쉬운 마음인 줄 알고 걸러 들었으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다.


이 모든 건 두 사람이 무서운 사랑으로 봉합해 나갈 일.

생각보다 손쉽게 봉합 가능한 일일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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