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른이 되는지 아나?

가전제품 사러갈 때다

by 고니크

인간이 언제 어른이 되는지 아나?

수능을 치르고? 아니.

독립했을 때? 아니.

첫 월급을 타 부모님 내복을 선물해드렸을 때? 아니.

결혼을 할 때? 아니다.


인간은 가전제품을 살 때 어른이 된다.

이유는 묻지 마라. 머리 졸라 아프니까.


엊그제 정기랑 가전제품을 보러 갔는데, 난 그때 내가 어른이 되고 있다고 느꼈고 동시에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전제품을 보러 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세탁기 냉장고를 고르는 쇼핑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다.

쇼핑? 자신 있어.

근데 실제로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더라고.


내가 살 집의 규격을 머릿속에 꿰고 있어야 하며, 생활의 동선을 미리 짜두어야 하며, 내가 이 냉장고로 얼음을 자동으로 얼려 먹을지 내가 알아서 만들어 먹을지,

세탁과 건조를 동시에 할지 세탁 따로 건조 따로 할지,

청소는 침구까지 할지 바닥만 할지를 정하는... 섬세한 미래 계획이 수반된 업무였다.

난 몰랐어. 큰돈 쓰고 기분 내는 날인 줄 알았지.


아침에 눈을 떠 집 앞 삼성 매장엘 갔다.

어떤 제품 사실 건가요? 음... 다 사야되는데요.

다 뭐요? 거기서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가만보자... 밥 먹어야 되니까 냉장고는 있어야 하고 더우면 안 되니까 에어컨도... 세탁기랑 건조기도요. 요리해야 되니까 인덕션, 난 베이킹 좋아하니까 오븐. 아, 오븐이랑 전자레인지, 에어프라이어 다 되는 제품이 있다고요? 그래요 그거. 그리고 TV! 또... 청소기? 흠 공기청정기... 이참에 노트북도 바꿔?


나랑 정기는 그제야 필요한 물건들을 읊기 시작했고 체감상 1억 정도는 써야 이걸 다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직원은 냉장고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냉장고... 왜 종류가 많은 건데. 안이 올 스테인리스로 되어있다거나, 일부분을 김치냉장고 기능 추가할 수 있다거나, 히든 도어가 한 개있지 두 개인지, 얼음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지 마는지, 에너지 효율이 1등급인지 아닌지... 냉장고의 개수가 어림잡아 백 개가 넘어보였다. 내가 원하는 냉장고는 그저 윗칸은 냉동고고 아랫칸은 냉장고인 하얀색 네모난 건데요.


냉장고를 시작으로 세탁기, 건조기, 인덕션, 에어컨까지... 아주 작은 기능들을 세분화 시켜놓고 이게 추가되면 20만 원이 올라가는 그런 구조였던 것이다. 신혼 가전은 무조건 좋은 거 해야 한다며 한 단계 낮은 것보다 얼마 차이 안 난다며 나를 꾀어내는 달콤한 말들. 미안한데, 저는 단 거 안 좋아해요.


‘얼마 차이 안 나요’에 휘둘려 한 단계씩 좋은 걸 선택하다 보면 스파크 사러 왔다가 벤츠 사서 나가는 사람 꼴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그치 정기야. 우리 정신ㅊ... 정기야?


정기의 정신은 이미 나가 있었다.

가장 최신의 것, 가장 비싼 것, 가장 큰 것을 사야 직성이 풀리는 내 새끼. 가끔 내 새끼에서 ㄴ을 ㄱ으로 바꾸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이 꽤 힘들다. 정기는 벤츠를 사기로 결심을 마쳤는지 뭐든지 최고 좋은 것으로 골라달라고 했다. 아니... 너 요리 안 하잖아. 냉장고 좋을 필요 없잖아. 안 된대. 자기 김치냉장고 기능에 콜라 넣어야 된대. 청소기는... 안 된대. 침구 청소 꼭 한번은 해보고 싶었대. 빨래는 진짜 나만 하잖니. 그것도 안 된대. 좋은 건 다를 거래. 아니 그래도 정기야. 공기가 꼭 청정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황사에서도 잘 살아남았잖아. 안 된대. 자기 비염이래. 언제부터 너가 비염이었는데.


눈이 돌아버린 정기의 주도로 가전을 살피고 견적을 받아보니 거진 1,500만 원 정도가 나왔다.

^^ 네... 알겠어요. 네. 그럼요. 저희 돈 있어요. 하지만 다음 달에 다시 올게요.

발걸음을 못 떼겠는 정기를 끌어내 정신 교육을 다시 시켰다. 정기야. 너무 좋은 거 필요 없어. 우리 지금 들어가는 집에 평생 살 거 아니라고. 2년 뒤면 이사갈 거잖아. 어? 자 이번에는 엘지를 가볼 건데, 거기서는 적당한 거, 정말 필요한 것 위주로 보자. 알았지? 교육이 다 맞춰졌다고 생각하고 옆에 있는 엘지 센터로 들어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신혼 가전은 가장 좋고 비싼 걸로 해야 한대. 세탁기는 LED도 있고 LCD도 있고 (저는 그냥 버튼식이 좋아고)

톡톡 노크하면 냉장고 안이 보이는 기능도 있단다. (안 보고 싶어요) 공기청전기능이 들어간 에어컨보다 에어컨 따로 공기청전기 따로 사는 게 훨씬 기능적이라는 직원. 20만 원 차이 밖에 안 난다고 하는데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삼성이나 엘지나, 너네 친구인 이유가 있었구나.


하, 참나. 나는 최대한 똑부러진 표정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요. 그렇게 좋은 거 필요없ㄱ...


“엘지 왔으니까 이참에 재연이 노트북도 새로 바꾸자”


... 어? 내 노트북?


“바꿀 때 되지 않았어? 이참에 사자.”


웅!!!!!!!!!!!!!!!!!!!! 히히. 여러분 저 노트북 바꿔욘!!!!!!!!!!!!!!


......... 인간은 언제 어른이 되는지 아시는가. 자기 안의 가장 비겁한 부분을 마주하게 됐을 때, 수치스러운 부분을 인정하게 됐을 때 어른이 된다. 나는 노트북 하나로 어른이 됐다. 엘지 좋아욘! 최고!


엘지에서 견적을 받아보니 2,200만 원이 나왔다. 어마무시한 금액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다시 아빠 집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 아빠 집에 살았을 땐 아빠가 사온 가전과 가구를 맘껏 누리며 전기와 가스도 한껏 쓰고 살았는데...

나의 장래희망은 캥거루족이었지만 아빠는 캥거루가 아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좌절을 겪는구나. 아빠 미워. 왜 캥거루로 태어나지 않은 거야. 아빠는 캥거루가 아니면서 왜 나를 캥거루로 키운 거냐고.


일단 정기를 데리고 엘지 센터도 유유히 나왔다.

오늘은 가전을 보고 온 날이야. 정말 말 그래도 ‘보고’ + ‘온’ 날. 집에 가자. 내가 두릅튀김 튀겨줄게. 우리는 좀 더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디자인은 삼성 압승. TV도 삼성이 더 좋다. 하지만 세탁기건조기노트북은 엘지가 더 좋아. 고민이다. 이거 먼저 결론이 나야 그 다음 스탭을 정하지 않겠어?


그래서 말인데요. 신혼가전으로 뭘 추천하시나요.

삼성? 엘지? 아님 제3의 다른 방법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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