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촬영 이야기 1
정기는 낯을 많이 가린다.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하는 그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손가락 다섯 개 안에 들 정도로 내향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도 낯을 가린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사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매일 붙어있었다. 난 정기와 사귀기로 한 날 저녁에 짐을 싸들고 7평 정기의 원룸으로 들어가 살았다. 따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매일 만나야 하는 건 서로에게 너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다음 해가 돼서 내가 독립해 보금자리를 구하면서 이번에는 정기가 원룸 계약을 해지하고 내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말 그대로 매. 일. 붙어있었다. 그래서 몰랐다. 정기가 아직 나를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사귄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정기가 대회 때문에 2박 3일 지방을 다녀왔다. 처음 오래 떨어져 있는 거였으니 얼마나 애달팠는지... 정기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현관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우다다 달려 정기 품에 안겼는데... 뭐지? 이 딱딱한 목석같은 건. 으레 돌아와야 할 다정스런 포옹 피드백이 안 오는 거다. 굳은 채로 멈춰 선 정기 때문에 나는 그냥 전봇대로 달려가 부딪힌 사람이 되었다. 보고 싶었다는 내 말에 정기는 "아... 어... 나 잠만..."하고 들어가더니 짐만 삼십 분을 풀었다. 난 정기가 피곤해서 그렇구나 싶었다.
사귄 지 2년이 됐을 때도 그랬다. 고향에 다녀온 정기.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정기에게 달려갔더니 정기가 나를 보고 굳는 거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왔어?" 하는 나를 정적 속에서 보던 정기가 울컥 나를 껴안더니, 무슨 격정멜로드라마처럼!, "(염소소리로) 내가... 재연이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눈물이... 나네..." ...? 네? 뭔... 네? 허허. 그랬다. 정기는 진짜 저랬다. 정기의 낯가림은 3년 차 때 끝났다. 친구들끼리 신나서 여행 다녀와놓고 날 보곤 뚝딱거리는 정기. 아니 이렇게 뚝딱거릴 거면 여행 갔을 때 연락 좀 제때제때 잘하든가. 왜 저래. 내가 코에서 불을 뿜으며 길길이 날뛰자 그다음부턴 정기가 나를 어색해하는 일은 없었다. ...좋은 건가.
며칠 전 정기와 웨딩촬영이 있었다. 난 그날만을 위해 반년 전부터 다이어트를 했고 5kg 감량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세상 최고의 공주님이 되는 날. 하. 할 수 있어, 고재연. 할 수 있다고. 전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카메라 앞에서 간드러진 표정을 지으며 포즈를 잡는 것, 정말 정말 자신 없다. 자신만 없는 줄 아느냐 의지도 없다.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아침 일찍 청담 샵으로 떠나는 차 안. 나는 거울 속 쌩얼의 나를 보며 더더욱 기운을 잃어갔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요? 이 얼굴에 뭐 얼마나 대단한 화장을 한다고. 이목구비가 그대로 있는데 해봤자 뭐 얼마나 더 나아지겠느냐고요.
나아졌다. 화장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동양인 특유의 볼록 튀어나온 눈두덩이에 뭘 했는지 깊은 아이홀이 생겼고, 평평하던 눈 밑은 오동통하니 애굣살이 생겼다. 코가 새로 생기고 눈이 2배는 커졌다. 머리카락에 뭘 한 건지 얼굴도 작아졌다. 얼굴만 보면 나 8등신이야! 입꼬리 끝을 볼록하게 만들었더니 극호감의 웃상이 된 나. 나는 지금 분명히 무표정인데 거울 속 나는 웃고 있다. 브라끈에 간신히 닿는 내 머리에 미용사 분들이 남의 머리카락을 가져와 붙였다. 아 이런 거 붙이면 귀신 들린다고 했는데, 괜찮은 걸까. 몰라. 예쁘니까 괜찮다. 귀신도 내 번호 따갈 것 같다.
메이크업과 헤어가 1차 마무리되고 이모님의 도움으로 드레스까지 입은 나.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 자신이 너무 어색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면 어떡하지? 어?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외쳤다. "아무도 저 쳐다보지 마세요!" 그 뒷 말은 삼켰다. '저한테 반하실 수도 있거든요.'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메이크업 2차가 남았다. 잠깐의 대기시간, 정기가 있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화장도 받고 머리 세팅도 한 정기가 저 멀리서 폰을 하고 있다. 넓은 어깨를 불량하게 굽히고 얇고 긴 다리를 한 번 꼰 자세. 내가 딱 좋아하는 정기의 양아치미 자세다. 내가 "쩡기!" 부르니까 그 자세 그대로 눈만 힐끗 위로 떠서 날 보더니 다시 폰 화면에 집중하는 정기. 참나. 무드 없어. 난 기대도 안 했다. 정기는 내 드레스 투어 때도 별 감흥을 못 느꼈다. 내가 "올~ 정기 멋있는데~ 화장했는데~" 놀려도 정기는 폰 화면에 시선이 고정돼 있을 뿐이다. 근데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정기는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가버렸다.
잠시 후 화장실을 다녀온 정기. 정기의 얼굴에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내려서 번진 파운데이션 자국이 적나라하다. "홍정기! 내가 화장하고 얼굴 만지지 말랬지! 나 좀 봐봐. 아우 어떡해" 정기의 화장을 수습해 주려는 나를 모른 척하고 갑자기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떠나버리는 정기. 왜 저래 진짜? 그 사이 내 2차 메이크업 시간이 다가왔고. 샵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공주님 방으로 들어섰다. 네 명의 스탭들이 날 둘러싸고 이리 두드리고 저리 두드리고 난리가 난 이 방. 그때 헤어 실장님이 조금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선 "저기... 신랑님 앞쪽에 나가계시면 대기실이 있거든요..." 정기다. 정기가 공주님 방 입구에 들어붙어서 나를 보고 있다. "아, 네..." 쿠사리를 먹은 정기는 금방 자취를 감췄다. 왜 저래 진짜?
그렇게 다시 재개된 프린세스 메이커 시간. 여덟 개의 손들이 나를 만지니 잠이 솔솔 온다. 행복하다. 이게 관리받는 기분이라는 건가. 공주 되는 거 너무 좋고, 내 체질 같다. 나 전생에 선화공주, 덕만공주, 천명공주, 효명공주, 낙랑공주, 평강공주, 문명공주, 경신공주, 명화공주, 보명공주, 신정공주, 의화공주, 경화공주, 정화공주, 숙화공주, 덕온공주, 경안공주, 경혜공주, 화완옹주, 청연공주, 명선공주, 숙의공주, 정안공주, 숙의옹주, 숙명공주, 정현공주, 의창공주, 숙정공주, 정혜공주, 혜경궁홍 씨였을 수도.
그때 메이크업 실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랑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눈을 뜨니 또 정기다. 정기가 또 공주님 방 입구에 들어붙어서 나를 보고 있다가 혼이 난다. "아닙니다..."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당최 몸은 절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기. 아까부터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참다못한 내가 "정기 왜 그래. 왜."
그랬더니 정기가 대답했다.
"예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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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기가 나 예쁘대! 정기가 나 공주님 같고 사랑스럽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홀렸대. 나한테 두 번째로 반했대!!!!!(그런 말은 한 적 없음) 갑자기 모든 퍼즐이 짜 맞춰졌다. 내 눈을 마주치지 않는 정기. 핸드폰만 보던 정기. 갑자기 화장실을 다녀오고 볼 부분 화장이 다 무너져 있던 정기. 샵에서 준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이켜 놓고도 물을 또 마시겠다는 정기. 그제야 드는 기시감. 나를 오랜만에 볼 때마다 틱틱거리고 괜히 저 멀리 가서 내 부름에 눈도 안 마주쳤었던 홍정기. 낯가리는 홍정기. 오랜만에 보는 내가 너무 좋아서 무표정함으로 뚝딱임을 감추려고 했던 귀염둥이 홍정기. 정기가 화장한 나를 보고 또다시 낯을 가린 거다. 내가 너무 예뻐서. 내가 너무 좋아서.
정기와 첫 포옹을 했을 때 느꼈던 쾌감과 성취감이 오랜만에 찾아와 나를 뒤흔들고 갔다. 좋다. 나는 이제 뭐든 할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 간드러진 표정? 해줄게. 귀여운 척 찡긋 콧잔등을 찌푸리는 표정? 해준다고. 말만 해. 신데렐라, 백설공주? 팅커벨, 장화 신은 고양이? 다 할 수 있어. 정말 다 할 수 있다.
- 웨딩촬영 이야기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