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어버이날이다. 이거 이거 어버이날 나는 규탄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평하지가 않은 날이야.
어린이날은 어? 초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이제는 어린이 아니라고 챙겨주지도 않았으면서 왜 어버이날은... 왜 어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버이냐고. 어버이는 졸업도 뭐 휴학도 없어요? 34살도 어린이날 챙겨주면 안 돼요? 저 키만 보면 어린이에요.
이 얘기를 아빠한테 했다. 곧 답장이 왔다.
[아빠도 키만 보면 어린이다.]
...
이렇게는 못 살겠다. 뭐가 됐든 반대한다. 무엇이든 해체하라. 누구든지 하야하고, 이것저것 보장하라. 보장해. 보장하라고. 흑흑흑흑... 몰라. 싫어요. 갑자기 어린이날도 싫다고요. 고씨 집안 부녀는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키를 기준으로 어린이날을 챙긴다면 우리 집의 부양자는 고정우 하나 뿐이겠구나. 이 누이가 너의 어깨에 많은 짐을 지울 뻔 했다. 미안하다. 용서해라. 아니 용서하지 마...
설날과 추석, 크리스마스와 아빠 생일, 그리고 어버이날은 항상 지갑 사정이 사정없이 쪼들릴 때마다 온다. 누가 일부로 짠 것같다. 내가 병원 검진으로 20만 원 긁으면 갑자기 띵동. 조금있으면 어버이날입니다. 이런 식인 거다. 하, 이번에도 돌아왔다니 어버이날.
효도에는 왜 돈이 필요할까? 아빠는 내가 그냥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주시면 안 되나? 내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아빠 탓도 있다. 나와 정우 10대 시절, 아빠는 무신경하고 꼼꼼하지 못한 두 자식들의 성격을 이용해 일 년에 두 번씩 생일을 챙겼다. 양력 한 번, 음력 한 번. "다음 주에 아빠 생일이다"하면 화들짝 놀란 나랑 정우는 후다닥 선물을 마련한다거나 아빠가 시킨 일을 한다거나 좋은 식당으로 아빠를 데려갔다. 그리고 룰루~ 해냈다! 하고 잊어버림. 그리고 한 달 뒤 아빠가 또 "다음 주에 아빠 생일이다"하면 헉! 아빠 생일이라고! 화들짝 놀란 나랑 정우는 후다닥 선물을 마련한다거나 아빠가 시킨 일을 한다거나 좋은 식당으로 아빠를... 뭔가 기시감이 들어 정우에게 "아빠 생일 최근에도 챙겼던 것 같은데"하면 정우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음... 몰라!"한다. 그럼 나도 곧 "몰라! 룰루!"하며 잊는 거다. 이런 일이 6년 동안 반복됐다. 아빠의 사기 행각은 내가 스마트폰을 사서 가족들의 생일을 달력에 입력하면서 끝이 났다. 분하다. 그때 챙겼던 걸 그냥 지금 어버이날로 퉁치고 싶다.
정우는 아빠한테 10만 원을 보낼 거란다. 10만 원? 뭐 적당하지. 적당해. 적당한데 나한테는 지금 그 적당한 돈이 없다. 올해는 더더욱 그렇다. 병원 검사비도 크게 나갔고... 하 이번 달은 책도 너무 많이 사 읽었고... 결혼식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5월은 부부의 달이잖아요. 부부의 달이라 그런지 애도 너무 많이 태어났고. 저절로 생일도 참 많고, 저 웨딩촬영 하려고 승모근 보톡스도 맞았다고요. 다이어트한다고 다이어트 음식은 또 얼마나 샀는지... 그니까 아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수를 썼다. 현금으로 주지 말고 물건으로 주는 거야. 가격은 저렴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물건으로. 발 마사지기가 제격이다. 발 마사지라니, 효도 느낌도 제대로 난다. 내가 고른 건 6만 원짜리였다. 아빠에게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보냈더니 곧장 1이 지워졌다. 두근두근. 눈치챘나 나의 꼼수를? 바로 전화가 온다. 쓸모없는 걸 샀다고 돈으로 달라고 하려나? 두근두근. 아 그냥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시 돈으로 부칠까. 전화를 받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고양되어 있다.
"역시!!!!!!!!!!!!! 우리 딸!!!!!!!!!!! 와~ 어떻게 이렇게 좋은 걸! 발 마사지기를 어떻게 아빠한테! 역시 우리 딸 다 컸다!!!!!! 캬..... 대박! 엄지 척!!!!"
... 완벽하게 속였다.
핳ㅎ하하하하하 그래 올해는 이렇게 넘어가는 거야. 6만 원으로 효도 끝낸다. 나는 최대한 부연설명을 하며 그 발마사지기가 얼마나 좋은 거고 별점은 몇 점이며 연예인 누구도 쓴다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거짓말이다. 수백수천만 연예인 중 누군가는 쓰긴 하겠지. 마음 한 켠에 껄쩍지근한 뭔가가 달라붙어있는 걸 모른 체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빠 죄송합니다. 생신 때 제대로 쏠게요. 어버이날에는 발마사지기보단 '기분 좋음'을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쪼리에 달라붙은 껌을 떼려고 발을 훌훌 털면서 걸었다. 나에게서 안 떨어지는 이 귀찮은 게 껌이 맞나. 맞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빠한테 또 전화가 오는 거다. 젠장. 들켰구나. 아빠가 이 발마사지기 가격을 찾아봤구나. 애교 부릴 준비를 잔뜩하고 전화를 받는다.
"재연아!!!! 큰 일났다!!!!! 선물 받기 주소를 이사 오기 전 주소로 잘못 넣었다!!! 이거 어쩌냐 어?"
다급한 아빠의 목소리. 딸이 준 최고의 선물을 이상한 곳에 갖다넣게 돼서 걱정이 되는 저 흥분한 목소리. 으윽. 아빠의 걱정이 내 양심을 찌른다.
"이거 딸이 해결할 수 있어? 어? 전화해서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볼까? 어떻게 해야 되냐 도대체!"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배송지 수정 하는 방법을 모르게 된 늙은 우리 아빠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런 아빠를 6만 원에 퉁쳐서 넘기려고 했던 나의 간사함. 털썩. 졌다. 차라리 아빠가 어디서 6만 원짜리로 어영부영 자기 눈을 속이려고 했냐고 화를 냈으면 '뭐 어쩌라고! 딸 돈 없엉!' 반격이라도 했을 텐데... 아빠는 왜 내 선물에 이렇게 절박하게 좋아하냐고. 생일 음력, 양력 다 챙겼던 그때의 아빠는 어디 간 거야. 졌어요. 졌다고.
"아빠 내가 그거 보낸 거 취소하고 다른 걸로 다시 사서 보낼 테니까 집 주소 카톡 보내놔."
알았다고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 다시 신이 났나 보다. 큰 문제를 맏딸이 제대로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 섞인 대답. 흐흑흑흑. 나는 6만 원짜리 발마사지기를 취소하고 유명 브랜드의 20만 원 대 발마사지기를 고른다. 젠장. 6만 원짜리를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요, 고금환 씨. 젠장. 그냥 처음부터 현금 10만 원 줄 걸. 괜한 꼼수 부렸다가 20만 원 나가네. 젠장. 젠장!
이번에는 아빠에게 진실만을 말한다. 이거 되게 좋은 거야. 암환자들도 쓰는 거래. 사람 몸은 발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발 혈액순환이 잘 되면 몸 전체가 건강한 거야. 하루이틀 하고 끝내지 말고 꼭 매일매일 자주 해. 알았지? 좋아서 격양된 톤으로 알았다고 답하는 아빠. 하, 진짜 이상하네. 분명 현금 10만 원도 너무 아까웠고, 6만 원짜리 발마사지기는 그것보다 더 아까웠는데 20만 원대 발마사지기는 하나도 안 아깝다. 갑자기 이런 마음까지 든다. 확씨 전신마사지기 사드려버려? 어?! (못 삼)
6만 원에 막을 수 있던 거 결국 20 얼마가 털렸다는 나의 썰을 듣고 정우가 폭소를 터트린다. 나도 내가 어이 없어서 웃음이 난다. 허 참. 누가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냐. 몰라, 카드로 살 거나 있는 걸로 어떻게 먹거나 해야지. 어. 그래. 알겠어. 너도 잘 살고. 별 일 있으면 또 연락해. 어. 끊어.
쪼리에 달라붙었던 게 어느새 떨어졌는지 발걸음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