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가 왜 30만 원이야

by 고니크

나는 뭐든지 미리미리 준비하는 사람이다.


2년 전 나는 숏컷이었고, 나에게 어떤 계획이 생겼기 때문에 미용실 다니는 것을 중단하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내 머리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자 어느 날 정기가 물었다.


"요새 머리 안 자르네"

- 응


"왜?"

- 2년 뒤에 결혼하려고.


"결혼해?"

- 엉. 너랑.


나의 결혼 준비는 너무나 비밀스러웠기 때문에 나는 신랑 당사자에게도 비밀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나는 정기에게 우리는 2년 뒤에 결혼할 거고, 결혼할 때쯤이면 내 머리길이는 가슴 중간까지 오게 될 거라고 말했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처음 들은 정기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하긴 덤덤할 수밖에 없지. 내 계획은 한 번도 어긋난 적도, 보류된 적도, 밀린 적도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하리라 결정했으니 우리의 결혼은 진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정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가올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정도 뿐이었다.


2년이 지났다. 계획대로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됐다. 우리는 신혼집에 들어왔고, 결혼식은 3개월 후로 잡혀있으며 내 머리카락은 가슴 중간까지 내려왔다. 지금이 내 인생 최고로 머리가 긴 시절이다. 나는 나를 안다. 나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머리를 숏컷으로 자를 새끼다. 긴 머리카락이란 거추장스럽고, 귀찮으며, 집안을 더럽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긴 머리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정확히 3개월 남았다. 나는 평생의 로망이었던 긴머리 히피펌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얼마나 귀엽고 펑키할 거야? 트랜디하면서 클래식하겠지. 패션같으면서도 실용적일 긴 머리 히피펌, 잘 한다는 곳에서 하고 싶다. 인스타를 뒤졌다.


이 세상엔 금손이 되게 많구나. 어떤 사람이 시술하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히피펌도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네... 오케이. 골랐다. A 디자이너! ... A 디자이너의 시술을 예약하려고 들어간 창에서 나는 1초만에 뒤로 가기를 눌렀다. 파마 가격이 55만 원이었다. 이게 뭐지. 미용실을 안 다닌 2년 동안 미용업계에 피바람이 한 번 불었던 걸까. 눈여겨 봤던 B 디자이너의 미용실도 클릭해봤다. 파마 35만 원. ...어? 연예인들이 머리하는 곳인가? 이후 C 디자이너, D 디자이너, E 디자이너의 미용실까지 살펴봐도 파마 가격은 모두 30만 원대였다. 말도 안 돼.


지금까지 남들은 자기의 머리에 30만 원 넘게 돈을 들이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단 말인가. 충격이다. 인스타를 벗어나 동네 미용실을 뒤져봐도 첫방문 할인이라거나, 모닝펌 할인 같은 걸 받아야만 간신히 20만 원대로 파마 가격이 낮아졌다. 근데 그마저도 기장 추가로 +5만 원 해야 함. 이게 보통 가격인 건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숏컷이었어서 긴 머리의 고충을 이제 알게 된 것인지... 아무튼 긴 머리를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필요한 모든 물건은 태무와 알리로 구매하는 나로선 미용업계의 물가에 저항감이 크게 생긴다. 30만 원이면 좋아요만 눌러놓고 매일 들여다보던 운동화를 두 켤레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코스트코 가서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담을 수 있는 돈이고, 패딩을 하나 살 수 있는 돈이고, 6개월 주유비이며, 요가를 두 달 배울 수 있고, 식탁 하나를 새로 살 수 있다. 그뿐이냐, 30만 원을 동생에게 준다면 걔는 내 앞에서 환상의 똥꼬쇼를 보여줄 것이고, 정기에게 준다면 앞으로 평생 나 데리러오고, 데려다주고, 업어주고, 먹여주고, 재워줄 것이다.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30만 원이 떨어진다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행운에 눈물을 흘리며 감상문 65페이지 정도 쓸 것이야. 그건 그런 돈이라고. 그렇게 큰 돈을 매일같이 백 가닥 넘게 빠지는 까맣고 얇은 실들, 머리통에 의미 없이 붙어있는 가느다란 쓸모없는 장신구에게 써야 한다니, 이건 너무 싫다.


나는 이제 동네 미용실에서 벗어나 할머니들 미용실을 서치하기 시작한다. 이름하야 '여우야 머리하자'라든가 '샤넬 미용실'이라든가 하는 곳 말이다. 가격은 싸겠지 하지만 이런 미용실들의 단점은 도대체가 가격 정보를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이냐. 영업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전화번호도 없어 블로그탭 15페이지까지 후기를 찾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냥 지금 당장 숏컷하고 싶다. 히피펌은 무슨...


찬란했던 과거의 기억이 반짝 떠오른다. 30만 원만 더 벌면 한 달 수입 천만 원 채울 수 있었던 때. 친구들에게 단기 알바할 만한 거 없냐고 전화를 돌렸다. 30만 원 더 벌어 목표액을 채우고 싶었던 맘도 있지만 사실 더 큰 마음은 자랑하고 싶어서. 나 거진 월천작가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왔던 월천작가! 그게 나라고!


한 달 수입이 30만 원이었던 때도 떠오른다. 2개월 간 수입이 없었다가 간신히 기획비 명목으로 30만 원이 들어온 달이었다. 30만 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나요? 이미 무급으로 두 달을 버텼으면서 인터넷 게시판에 질문글을 썼다. 아무도 댓글을 달아주지 않았고, 난 교통비는 아빠카드를 쓰고 밥은 구내식당에서 먹자 속옷과 양말은 다음 달에 사기... 그런 계획을 세웠었다.


오랜만에 30만 원 장벽 앞에 선 기분은... 묘하다. 나를 성공 시키기도 절망시키기도 했던 그 돈. 그 돈을 겨우 머리카락에 쓸까말까 고민하고 있다니. 나... 빼박 어른 다 됐구나. 과거에 비해 지금의 내 고민은 너무 실생활적이잖아? 허허... 어른이야... 난 어른이 됐다고...


내가 어른이 됐다니. 매번 느낄 때마다 생경한 감각이다. 욱 당장 머리를 자르고 싶기도 하면서 반드시 긴머리 히피펌을 하고 싶단 오기도 든다. 아니 방금 그 문장을 쓰면서 마음을 정했다. 히피펌을 할 거다. 그래서 내가 어른이 됐음을, 아주 고집스런 어른이, 소시민적인 어른이 됐음을 체감할 거야. 그리고 거울에 대고 말해야지. 그랬던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그때의 고민은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건 사실 아무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나는 내가 나를 멋져하는지 미워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의 글도 이상한 결론이 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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