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번아웃, 다정한 남편이라는 가면이 무거워질 때

by 자신을사랑하기

17화: 번아웃, 다정한 남편이라는 가면이 무거워질 때


직장에서의 나는 여전히 견고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식당으로 향할 때면 누군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대리님, 오늘도 사모님한테 메뉴 보고하셨어요? 진짜 대단하십니다. 그런 정성이니 사모님 병세도 금방 좋아지실 거예요."


나는 그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 상태다. 오전 내내 병원 원무과와 통화하며 입원비를 정산했고, 오후엔 아이의 어린이집 하원 도우미를 구하기 위해 구인 사이트를 뒤져야 한다. "보고"라고 불리는 나의 통화들은 사실 아내의 발작 여부를 체크하는 간절한 검문이었고, 동료들이 말하는 "정성"은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는 생존줄이었다.


하지만 그 가면이 무겁다 못해 내 얼굴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아버님, 실은... 아이 몸에서 냄새가 좀 나서요. 친구들이 조금씩 피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내 귓가를 때렸다. '냄새'. 그 짧은 단어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후벼팼다. 아내가 아프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동안, 정작 가장 세심하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아이의 일상이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입원한 뒤 나 홀로 직장과 병원, 육아를 병행하며 아이를 씻기는 일조차 버거워했던 나의 태만이 아이의 몸에 '비린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날 퇴근하자마자 나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아이는 욕실 문턱만 봐도 자지러지게 울며 뒷걸음질 쳤다. 평소라면 다정하게 달랬겠지만, 그날의 나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안 돼! 오늘은 무조건 씻어야 해!"


나는 우는 아이를 억지로 안아 욕조에 앉혔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뿌리쳤고, 좁은 욕실 안은 아이의 울음소리와 튀어 오르는 물보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이를 씻기는 내내 내 손은 덜덜 떨렸고, 입술은 바짝 말라붙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는가. 사랑하는 아내는 철문 너머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딸은 아빠의 손길을 거부하며 울고 있는 이 현실이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결국 억지로 목욕을 마친 아이는 지쳐서 금세 잠이 들었다. 뽀얗게 씻긴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날 밤, 텅 빈 거실에서 소리 없는 오열을 쏟아냈다. 직장에서 "사랑꾼"이라 불리던 남자의 실제 모습은, 아이의 비린내를 씻어내며 자신의 무능함에 울부짖는 초라한 뒷모습일 뿐이었다.


번아웃은 그렇게 찾아왔다. 더 이상 타오를 에너지가 남지 않은 잿더미 같은 마음.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아내를 지키는 파수꾼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가짜가 아닐까. 다정한 남편이라는 가면이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음을, 나는 그 비린내 나는 욕실 안에서 뼈저리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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