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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두나 Jul 04. 2019

#13. 사람은 모름지기 머리를 써야 한다고 배웠다.

설 전날에 시가에 들어가기로 한 우리, 나는 이 일정을 위해 한 달 전부터 머리를 굴렸다. 


시댁 근처 마사지 및 에스테 샵에 전화를 돌려 설 전날에도 영업하는 곳을 찾아내 두 사람의 마사지를 예약했다. 예약할 당시 샵에 '시어머님'과 '나'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하자 전화를 받던 관리사분은 매우 놀라시며 되물었다. 


"시어머니요?" 


시어머님만 챙기면 섭섭할까 싶어 저녁에는 가족 단체 영화 나들이도 준비했다. 사실 이 모든 밑 작업은 철두철미하게 집안일을 모른 체(?) 하겠다는 심산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일.


시댁에 가서 전이나 조금 굽다가 시어머님이랑 마사지 가야지 라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점심때쯤 시댁에 도착한 우리, 아니 근데 부엌에서 벌써부터 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게 아닌가. 어찌 된 일이고 하니 이분들, 비버씨로부터 원래 엄마는 밑준비, 아빠와 우리들(비버씨와 도련님)이 전을 굽는다곤 들었으나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며느리를 시키시겠지 생각했는데 어쩜 이런 일이.


시어머님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명절 음식 밑준비를 하셨고, 그 준비가 끝나자 시아버님과 도련님(비버씨의 동생)은 우리가 오든 말든 이미 전을 굽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심지어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일은 4분의 3 정도 완료된 상황이었다. 시어머님은 배고프지? 밥 먹어~ 하고 밥을 차려주시고 거실에서는 시아버님과 도련님이 전을 구우는 이 풍경.


사실 나는 좋으면서도 묘한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으나 이미 엎어진 물, 그저 웃으며 구워져 나오는 전이나 한 개씩 주워 먹고 시어머님과 수다를 떨고 과일을 먹었다. 


이럴 땐 눈새가 최고다. 나는 끝없이 자기 암시를 되뇌었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해맑고 구김이 없다. 나는 전 같은 건 구울 줄 모른다!


어느덧 에스테 샵 예약 시간이 되었고 못내 그 자리가 괴로웠던 나는 재빨리 어머님을 납치하여 샵으로 이동했다. 휴


센스 있는 관리사분들은 내가 한 달 전에 미리 예약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어머님 + 며느리'조합은 처음 본다며, 엄마와 딸인 줄 알았다는 립서비스를 아낌없이 퍼부어주셨다. 우리 어머님의 어깨는 한없이 올라가고 나는 예쁘고 착한 며느리 되고 아주 금상첨화요 이 얼마나 평화로운 고부지간인가.


평생 아들 둘을 키우시며 딸과 함께 하는 재미가 없으셨던 어머님, 낯을 가리시면서도 내가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꺄르륵거리는 걸 좋아하시는 듯했는데 이 날은 아주 제대로 점수를 땄다. 게다가 마사지가 끝나고 돌아간 집은 눈치 있는 도련님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우리는 식사 후 도련님이 내려주신 커피를 마신 뒤 영화를 보러 나섰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명절의 한 장면인가.


명절을 타깃으로 개봉한 코믹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니 밤이 깊은 시각. 남편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찰나 '우리 집에서 자면 좋을 텐데-'라는 마음을 내비치시는 시어머님을 그냥 둘 수 없어 자고 가기로 결심했다. 밀려오는 다음날 아침에 대한 공포와 행여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버씨의 좁은 슈퍼싱글 침대에 두 덩치가 누워 선잠을 청한 밤. 



나는 그저- 부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연휴가 지나길 바라며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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