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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Nov 08. 2019

[불안 응급처치2] 이번엔  
예스24 굿즈로 막아!

집에 불났다 생각하고

집에 굿즈가 넘쳐난다. 책을 사는지 굿즈를 사는지 헷갈릴 정도다.

“나, 책 사려는데…. 예스 24에서 살까? 알라딘에서 살까?”

내가 소리를 지르면, 딸내미 방과 남편 방에서 이런 소리가 튀어나온다.

“굿즈 좋은 거로.”

그래서 사고 싶은 책을 쇼핑한다기보다, 가지고 싶은 굿즈를 구경하느라 시간이 더 걸린다.


“엄마, 나 이거 갖고 싶어.”   

지난 3월 예스 24에 미키 슬리퍼가 굿즈로 나왔다. 5만 원을 꿰어 맞춰 책을 사고 굿즈를 선택한다.

앙증맞다. 우리 집에는 이런 존재감을 드러내는 슬리퍼가 없는데, 삼선과 다이소 슬리퍼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인다.


그런데 딸내미의 미키 슬리퍼는 몇 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밖으로~’ 진격 명령만 기다리는 대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치명적으로 사이즈가 조금 작다. 가끔은 급하게 나가는 누군가의 발에 걸려, 발딱 뒤집혀 까만 신발 바닥을 드러내고 누워있어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엄마가 신어도 돼?”   

 “당근. 근데 엄마 발 사이즈 나랑 똑같잖아.”

 그래도 이쁘니까 슬리퍼에 발을 맞춰보려고 노력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존재감 있는 슬리퍼를 가지게 된 게 아주 잠깐 좋다.

존재감 있는 미키 슬리퍼

느닷없이 그분이 오셨다. 불안이라는 손님. 감정은 90초 정도 우리 몸에 머물고 지나간다 하는데,  ‘90초 머무는 손님을 하룻밤 자고 가시라고 이부자리 깔아주고, 며칠 더 있다 가셔도 된다고 끼니마다 밥상까지 차려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난 손님에게 내 안방을 내주는 걸 원치 않으니 그분을 내보내는 응급처치를 나에게 명한다.


당장 미키 쓰레빠 신고 뛰어!’

     

코끼리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처럼 이것도 3단계가 있다.

1. 미키 쓰레빠에 발을 집어넣는다.

2.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3. 뛴다.


이번에도 1단계가 가장 어렵다. 쓰레빠에 발을 집어넣는 게 뭐가 어렵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가 불안하다는 상태를 알아차려야 하고, 응급처치가 필요하다는 인식까지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다.


“집에 미키 쓰레빠 없으면 어떻게 해요?”

좋은 질문이다. 없으면 아무 쓰레빠나 괜찮다. 그래도 이쁠수록 마음에 들수록 쿠션감이 적절할수록 좋다. ‘미키 쓰레빠’를 불안이라는 손님을 내쫓을 방아쇠나 기폭장치(trigger)로 쓰려면, 아무래도 존재감 있는 놈이 낫다.


“뛰려면 쓰레빠 보다 운동화가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은 질문이다. 뛰는 데 운동화가 쓰레빠보다 당연 낫지만, 운동화 신는다고, 양말 챙겨 신고, 운동화에 깔맞춤 한다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다 보면 귀찮아서 포기한다. 순서의 장벽이 최대한 낮아야 한다. 한마디로 준비가 필요 없어야 한다.


내가 범불안 장애를 가진 30대 초반의 여자분에게 “쓰레빠 신고 나가서 뛰어!"라는 멋진 조언을 해주었더니, 진지하게 나를 보며 묻는다.


“그런데 화장은 안 하고요?”


참, 아직 살만 한가보다. 그러면 나에게 조언도 구하지 마!!! 그래도 물어봤으니,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답을 해준다.


“야~~~~~~맨얼굴로 뛰쳐나가! 넌 집에 불났는데, 민낯 보이기 싫다고, 파운데이션 펴 바르고 마스카라로 속눈썹 칠 하냐?”


맨 얼굴로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집에 불났다 생각하고 뛰쳐나가야 한다. 태국 코끼리 헐렁 바지든, 잠옷 바지든 그냥 입고 말이다.


우리 아파트에는 3개월에 만원만 내면 이용 가능한 꽤 훌륭한 시설의 짐(gym)이 있다. 그런데 귀찮아서 안 간다. 아는 주민 만날까 세수도 하고 양말도 신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갈아 신을 운동화까지 챙겨 신발주머니를 들고나가야 한다. 운동하러 간다고 없는 의지력을 다 긁어모았는데, 순서가 너무 복잡하면 준비하다 지친다.

너도 불안하면 한 번 신어도 돼

 시간과 거리의 장벽도 없어야 한다. 그분이 오셨는데, 날 밝으면 나가야지, 덜 추우면 나가야지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시간에 상관없이 아무 때나 쓰레빠를 신어야 한다.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혹은 이가 딱딱 부딪히는 영하 20도의 추위 건, 머리 꽁지가 타들어가는 더위 건 간에, 맨발로 뛰쳐나가야 한다. 달리기 좋은 코스 찾아간다고 전철 타고 1시간씩 가면 불안은 이미 안방에 들어앉아 있다. 동네 놀이터면 족하다.  


1단계 쓰레빠를 신었으면, 2단계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건  쉽다. 신발 신었으면, 우리는 자동으로 문고리 돌린다. 3단계는 무조건 뛰기다. 숨이 목에 탁 차오를 때까지, 침을 삼키기 괴로울 때까지 뛰어야 한다. 이만하면 됐어 하고 자기를 봐주면 안 된다. 뛰면서 자꾸 숨이 차는 경험을 해두면, 불안할 때 심장이 뛰고 숨이 가쁜 경험을 해도, 내가 운동을 하는지 불안한지 나의 뇌는 구분을 잘 못한다. 그래서 덜 불안하다.


좋은 건 해보면 바로 안다.

불안하면 맨발에 쓰레빠 끌고 아무 때나 뛰쳐나가라.


화.장.은. 하.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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