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7 율이 생후 297일의 기록
아침에 율이 옷을 갈아입히는데 어쩌다 보니 턱받이부터 내복 상하의, 조끼까지 모두 노란 톤이 되어버렸다. 율이를 보며 장난 삼아 "누렁아~"하고 불렀는데 그 말 한마디에 어릴 적 방학마다 놀러 갔던 외갓집 풍경이 떠올랐다. 외갓집은 시골 깊숙한 곳에 있었고 논두렁길을 한참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 길을 아빠는 어떻게 매번 기억해서 운전하셨을까.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었다.
"누렁아~" 하고 부른 그 순간 정확히는 외갓집 외양간이 생각났다. 더 정확히는 외양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있던 누렁이 소가 말이다. 누렁이 소와 눈을 맞추었던 순간, 날름거리는 혀로 여물을 먹던 모습, 여물의 냄새, 눅눅했던 외양간의 공기.
기억은 외양간에서 앞마당으로 이어졌다. 아빠 차가 출발하기 전, 끼익- 큰 소리를 내며 열리던 대문, 그 앞에 우리 가족을 마중 나왔던 외갓집 식구들. 여름날 마당에서 외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올챙이죽, 옥수수가루로 만들어 노란빛을 띠었고 꼭 올챙이처럼 생긴 모양. 그 위에 간장을 타서 먹었던 맛까지 떠올랐다.
집 문 앞에 걸터앉을 수 있는 공간엔 여러 개의 밀짚모자가 놓여 있었고, 그걸 쓰고 바닷가에 갔던 일도 어렴풋이 스쳤다. 새벽이면 포도밭으로 향했던 어른들의 모습까지. 장면들은 꿈속에서처럼 두서없이 큼직큼직하게 이동했다. 율이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다녔다. 그게 머릿속인지, 마음속인지 시작점은 알 수 없었다.
율이를 향해 던진 가벼운 “누렁아” 한마디가 어떻게 오래전 외양간의 누렁이 소와 연결된 걸까. 어릴 적 외양간에서 마주쳤던 그 소의 모습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그렇게도 강하게 남아 있었던 걸까.
또 하나 놀라웠던 건 내 기억 속에서 그 누렁이 소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시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소와 눈을 맞추고 있었던 것 같다. 몇 살이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만남이 강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점점 퍼져나가는 외갓집의 추억 속에서 처음엔 당황스럽기만 했던 마음도 서서히 누그러지고 몽글몽글한 따뜻함이 마음 한편에 퍼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율이에게도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떻게든 쌓이고 남겠구나. 그것이 참 중요하겠구나.
요즘 율이가 외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엄마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모두 쌓인다’는 생각이 든다. 율이는 생후 100일이 되기 전에 낯가림을 처음으로 했다. 정확히는 생후 88일이었는데 내가 태어난 년도가 88년도이기도 해서 낯가림을 시작했던 날이 기억난다. 그 후로도 한동안 친정엄마에게 낯가림을 했었다. 생후 297일이 된 율이는 친정엄마를 나와 남편 다음으로 잘 따른다. 친정엄마가 율이에게 그동안 보여준 사랑들이 쌓이고 쌓인 것을 율이도 알아주는 게 분명하다.
사실 오늘 아침 율이에게 처음으로 "율아, 이러면 힘들어"라고 말했다. 아침 이유식을 먹이는데 숟가락에 담긴 음식을 손으로 쥐었고 음식이 잔뜩 묻은 손으로 귀와 머리카락을 만졌다. 어제 이유식을 먹을 때도 귀와 머리카락에 음식이 묻어서 거의 머리를 감기듯이 씻겼었다. 오늘 아침은 비가 오고 날이 흐렸는데 내 몸에도 비가 내린 듯 그야말로 물먹은 솜이불처럼 몸이 무거웠다.
힘들다고 하면 아기에게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율이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다. 사실 친정엄마나 친정아빠가 율이의 어떤 행동을 보며 "율아, 그렇게 하면 니 엄마 힘들어" 할 때도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얘기하면 율이에게 안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내가 밥을 잘 챙겨 먹으려는 것도, 파마를 하려는 것도 율이를 키우는 내 몰골이 힘들어 보이면 율이가 나를 힘들게 하는 아기가 될 까봐, 이것이 무척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이 말을 뱉어버렸다.
그렇게 오후 시간이 됐고 바닥을 청소하는데 율이가 내 등짝에 바짝 붙어서 어깨를 쳤다. 율이가 어부바를 해달라는 신호였다. 그런 율이가 순간 너무 귀여웠다. "율아 업어 달라고 하는 거야? 어부-바"
"어부바해줘? 어부바?" 어부라를 계속 말하니 율이는 정말 "업-빠"라고 한 것 같았다. 오늘 내내 "아빠" "아빠" "아빠아아아" 했는데 그 소리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부바를 하고 들썩이는데 율이가 까르르 웃었다. "율아, 맞아. 우리 율이가 피로회복제지"
율이는 오늘 어떤 감정과 어떤 경험들을 마음속에 쌓았을까. 우리 누렁이 율이 덕분에, 하루가 깊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