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냥 걸었어요

구포 무장애 숲길

by 키키 리리

날씨가 점점 더워진다. 어린이들이 모두 학교로 떠난 오전 8시 30분.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갈 것인지 집에 머물 것인지 나는 서둘러 결정해야 했다. 장마를 앞둔 시점이라 무척 후덥지근한 날씨가 예상되었다. 한낮 기온이 28~29도쯤 된단다. 이런 날에 서너 시간 돌아다니다간 땀에 절은 생쥐꼴로 돌아올게 분명했다. 노화로 인해 가늘어진 머리털은 잔뜩 축축해진 채 미역줄기처럼 이마를 가로지르겠지. 잘 구운 쿠키처럼 노릇노릇해진 팔과 다리는 짙은 찰흙 색처럼 변할지도 모른다.


정말 나가기 싫었다. 시원한 콩국수를 먹으며 땅바닥에서 뒹굴뒹굴거리고 싶었다. 시장에서 하루 걸러 한 통씩 사 오는 콩물은 우리 집에서 내가 다 마신다. 이 좋은 걸 왜 아이들은 안 먹지? 하면서 속으로 기뻐한다. 오로지 내 차지니까. 얼음과 채 썬 오이가 가지런히 놓인 콩국수를 그리며 다시 한번 나가기 싫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운동화를 신었다. 열심히 걷고 난 뒤의 상쾌함과 오늘도 새로운 곳을 돌아다녔다는 자부심이 그리웠다. 잊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3년 전의 나라면 꿈조차 꾸지 못했을 일. "중증 우울증 환자라면서 어쩜 그렇게 잘 돌아다녀요?"라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일단 항우울제를 먹으니 숟가락을 들 힘이 생겼고, 밥을 먹으니 기운이 났고,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년 정도는 집 근처만 메아리처럼 뱅뱅 돌았다. 버스를 타고 낯선 곳을 걷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한다.


오늘은 구포 무장애 숲길로 향했다.




첫 번째 전망대


숲길은 왕복 4km 정도 된다. 교통약자들도 숲 속을 편히 걸을 수 있도록 굴곡 없는 편편한 나무길이 쭈욱 이어졌다. 바닥엔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알려주는 작은 숫자판이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많이 등산을 하고 있었다. 이 숫자판이 때론 희망이 되기도 했고 절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열심히 걸었는데 고작 이만큼 왔단 말인가? 열심히 걸었는데 벌써 이만큼 왔단 말인가?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처럼 숫자판을 대하는 내 마음도 두 질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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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2_103124.jpg 첫 번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두 번째 전망대


너무 더워서 정말 혀를 길게 빼고 헥헥거리고 싶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마스크는 진작에 벗어버렸고 가져온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걸었다. 그러다가 마주 오던 여자분이 갑자기 나를 향해 "헤이~"하고 소리쳤다. 나는 웬일인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오히려 놀랐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아니네." 하고는 돌아서서 가버린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불러놓고 그냥 가버리다니. 내가 자신의 지인과 무척 닮아서 착각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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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2_104011.jpg 두 번째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세 번째 전망대


정상까지 600m 남았다는 안내판을 보고 울고 싶었다. 날벌레에 물릴까 봐 긴바지를 입고 온 게 한스러웠다. 어찌나 더운지 발걸음을 뗄 떼마다 더운 열기가 훅훅 올라왔다. 아직 오전인데 오늘 얼마나 더워지려고 벌써부터 이러나 싶었다. 앞서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만 쫓으며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라고는 걷는 일밖에 없는 조금 서글픈 인간이 되어 걷고 또 걸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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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아직 내가 보지 못한 풍경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전망대에서 본 풍경이 좋았다. 조금씩 높아지는 내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일이 흥미로웠다. 같은 장소라도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 나는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이 무척 궁금했다. 이 궁금함이 나를 자꾸 밀어 올렸다. 두 발은 추진기가 되어서 나를 위로, 위로 민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일단 범방산 전망대 표지석과 낮에 뜬 달을 사진으로 찍고 전망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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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전망대


좋았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한 공기 속에서 여름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구비구비 흐르는 낙동강과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가덕도와 김해 국제공항이 시야에 들어왔다.

20220622_105426.jpg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뜬금없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대견스러웠다. 10년 전의 나는 볼펜으로 온몸을 긁고, 밤마다 베란다 앞에 앉아서 통곡을 했다. 왜 이모양으로 살고 있냐고 한탄했고,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때론 머리를 벽에 박으며 울었고 희망 따윈 사라졌다고 절망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대답 대신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을 부지런히 사진으로 남겼다. 그게 마치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도 되는 듯 정성스럽게 찍고 유심히 세상을 바라보았다.




누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다시 물어본다면 내 대답은 하나다.


그냥 걸었어요.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앞으로도 제가 즐겁게 걸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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