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나는 G도시를 떠나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와서는 대학병원에 있는 정신과를 다녔다. 복직해서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예약시간을 잡기가 무척 까다로웠고, 거리 또한 무척 멀어서 병원에 잘 갈 수 없었다. 증상에 맞춰 약만 먹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랜 우울증 생활을 미뤄보면 사실 심리상담과 약 복용을 병행하는 게 제일 좋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새 학교에 전입하자마자 휴직했기 때문에 복직할 학교에는 아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알고 있던 지인은 내가 일을 잘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한다고 관리자에게 귀띔을 해둔 상태였다. 나는 훗날 이 이야기를 듣고 좌절했다. 내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과거의 나를 떠올려 미리 언질을 뒀기 때문인지, 복직자라는 숙명 때문인지 최고 기피학년에 전임자가 못 하겠다고 두손 두발 들고 떠난 업무를 내가 맡았다. 물론 자의는 아니다. 딱 5개월 근무 후 지독한 눈병과 방광염에 시달렸다.
게다가 아이들은 자주 아팠다. 한 달 내내 코감기를 달고 살았고 늘 항생제를 먹었다. 병원은 집에서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라 퇴근하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기 바빴다. 아이들이 자주 아픈 것은 모조리 내 탓 같았다. 작게 태어나 먹성이 그리 좋지 않았던 둘째, 잘 먹었지만 자주 아팠던 첫째. 단 한 번도 포동포동하게 살찐 아이를 안아보지 못한 나는 조카들의 토실토실한 허벅지를 볼 때면 그저 신기했다.
일주일에 2~3번씩 이비인후과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삶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시절을 회상하면 G도시에 살던 시기처럼 힘들고 매서운 기억만 남아 있고 좋았던 기억은 잘 없다. 지금도 그때 해결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라 힘겹다.
시누이가 진통으로 병원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전화 한 통 없다며 "넌 매정하다."라고 말한 시어머니의 말씀이나 "네가 입덧을 너무 심하게 한 탓에 애들이 모두 작게 태어났다."라고 말한 엄마의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이런 몇몇 순간들은 과거로 흘러가지 않고 계속 현재에 남아 스스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머리를 때리거나 주먹으로 온몸을 두들기는 형태로 나를 괴롭힌다.
더욱 큰 문제는 내가 수업을 하는 학생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날뛴다는 데 있었다. 그해 나는 교권침해 사건을 겪었다. 수업 중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핸드폰을 하는 학생을 발견했다. 학생의 폰을 압수했다가 그 학생이 던진 필통에 맞을 뻔한 사건인데 그 학생은 그러고 나서 소리를 지르며 교실을 뛰쳐나갔다. 나는 그 학생이 자살이라도 할까 봐 미친 듯이 뒤쫓아갔다. 그 학생은 내가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며 학생인권침해 교사로 나를 몰아세웠다.
관리자나 동료교사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5교시에 이 사건을 겪고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채 6교시 수업을 해야 했다. 다음 날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반에 들어가 그 아이를 보며 수업을 해야 했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열고 싶었지만 업무담당자는 이 업무가 처음이라는 말을 남기며 열지 않았으면 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병가조차 내지 않은 채 묵묵히 다녔다.
악재는 또 있었다. 교원능력개발평가 서술형 문항에서 '정신병자', '맨날 죽을 상을 하고 다니네.' 이런 폭언이 적힌 글을 보았다. 교원능력개발평가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익명으로 교사에 대한 만족도를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익명 뒤에 가려진 학생들의 날 선 몇몇 반응은 우호적이고 건설적인 대부분의 내용을 모조리 상쇄시킬 만큼 파급력이 크다. 그 뒤로 나는 절대 만족도조사 서술형 문항 결과를 보지 않는다.
결국, 나는 1년 동안 개고생을 한 끝에 정신과 진단서를 내고 담임을 못 맡겠다고 교감 선생님께 말했다. 학교에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내 병을 방패로 학교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렇게 무너졌다. 당시 나는 학교에 내 병을 말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정신병이 있는 교사로 낙인 찍히는 게 싫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소문이 무서웠다.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무척 의식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오히려 나를 더욱 힘들게 했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