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우울증을 앓은 지 정확히 10년이 되었다. 2013년 4월에 난생처음으로 정신과를 방문했는데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인구 15만이 채 되지 않은 작은 소도시였다. 그런 동네에 정신과라곤 단 1개. 어느 곳의 의사가 친절하고 약 처방을 잘해주더라, 이런 풍문을 챙겨 들을 필요도 없는 곳이었다. 눈앞에 놓인 단 하나의 선택지는 다행히도 집 근처였고 걸어서 충분히 방문 가능한 거리에 위치했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생후 2개월 된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을 방문하였다. 40대로 보이는 여의사는 차분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증상을 차분히 설명하였다. 짜증과 분노, 수면 부족과 식욕 저하, 자해와 자살충동 등의 증상을 읊조리는데 눈물이라곤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게 여러 질문을 던졌고 나중에는 질문지 한 장을 주었다. 그리고 체크가 끝난 종이를 살펴본 뒤 이렇게 말했다.
"중증 우울증입니다. 아마 수년 전부터 우울증에 시달렸을 거예요."
나는 출산으로 인한 산후우울증이라고 짐작했을 뿐 오랜 세월을 우울증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의사는 당장 모유수유를 끊고 약을 복용하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아기가 좀 더 크면 저절로 나을 거라고 믿었다. 이 잘못된 선택은 치료 적기를 놓친 우울증의 진행과 속도를 빠르게 진행시켰고 나는 2016년 6월, 다시 병원을 방문하기까지 쌩으로 우울증을 견뎠다. 그 와중에 둘째까지 출산하여 완전 엉망인 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린이집을 가지 않은 3살짜리와 생후 50일 된 둘째를 혼자 돌보면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고 늘 배가 고팠다. 아이가 낮잠을 잘 때면 부엌에 서서 허겁지겁 밥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급하게 먹은 밥은 자주 체기를 불러왔고 나는 항상 변기를 붙잡고 토하기 바빴다. 더부룩한 속 때문에 까스활명수를 물 마시듯 수시로 마셨다.
밖에 나가서 놀아달라는 첫째를 늘 미워했다. 낮잠을 자지 않고 먹성이 좋지 않은 둘째를 힘겨워했다. 무엇보다도 어디론가 걸어가 죽고 싶었다. 아니, 떨어져 죽고 싶었다. 밤마다 앞베란다 바닥에 앉아 통곡했다.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달도 없었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은 내 삶과는 멀어 보였다. 이 불구덩이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은 온갖 사람들을 미워했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였다. 나는 나를 아주 오랫동안 미워했고 그 미움을 풀 길이 없어서 모나미 볼펜을 들고 온몸에 죽죽 그었다. 멍이 들도록 몸을 때리거나 손톱으로 다리를 긁어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이런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나를 붙잡고 엉엉 울었을 때 내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살게 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내게 병원치료를 권했다. 남편 역시 동의했다.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가 태어난 지 불과 2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병원을 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의사의 말을 잘 들었다. 그가 처방해 준 항우울제(졸로푸트)를 먹었고 모유수유를 끊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을 꼭 가지라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남편이 퇴근한 저녁 시간이나 주말이면 혼자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걷는 것은 무척 좋았다. 집에 매여 있었으나 어느 정도 자유로웠고, 혼자는 아니었지만 혼자일 수 있었다.
약의 효과는 하루이틀 만에 나타나지 않았다. 적어도 2~3주 정도는 지나야 효과가 나타났다.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 기분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우울의 정도가 -10이라면 그걸 -5정도로 끌어올려준다. 나는 그렇게 약을 통해,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서서히 회복했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내가 곧 복직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남편과 같이 살던 이 소도시를 떠나 부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했고 내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과는 주말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