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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구난방

공간을 비우며 알게 된 것

파묘(破墓)가 아니라 파농(破籠)을 했어

by 김이서

얼마 전, 아이를 위해 방을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간단히 장롱 하나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방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문 세 개짜리 가구를 비우는 순간,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가구 속에 숨어 있던 물건들이 새로 자리 잡을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아이의 방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파농(破籠)’이 집 전체를 조금씩 비워내는 일이 됐다.


처음엔 아깝게 느껴졌던 물건들이 하나씩 살펴보니 더 이상 내게 유용하지 않거나 단지 버리기 아까워 붙들고 있던 것임을 깨달았다.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무엇을 남길지 고민하며, 물건뿐 아니라 내 습관과 사고방식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입지 않는 옷들과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며, 단순한 정리를 넘어 진정 중요한 것과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들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물건을 줄이는 것은 감정의 짐을 덜어내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물건 하나를 손에서 내려놓을 때마다 그와 얽힌 추억, 후회, 또는 미련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놓아주는 느낌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없애는 것의 가치를 몸소 체험했다. 비워냄으로써 내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앞으로의 삶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더욱 명확해졌다.


아이 방을 꾸미는 일은 이제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방은 비어 있던 공간이 새롭게 채워져 아이가 꿈을 키워가는 장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에서 내 삶의 방도 새로이 정리했다. 물건과 감정을 덜어냄으로써 얻은 여백은 내가 더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공간을 비운다는 것은 곧 삶을 채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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