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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아이들과 최숙희 작가의 <엄마의 말>을 함께 읽었다. 초등 3학년 이상은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한다. 한 아이가 또박또박 읽어나가다가 멈췄다. 목이 살짝 메이더니 못 읽겠다고 했다. 그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돼서 순간 목구멍에서 울컥 무언가 걸렸다. 바다에서 놀다 죽은 자식을 떠나보내는 장면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평소의 태도를 잠시 멈춘 아이는 그림을 한참 쳐다봤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다. 책 속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고 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아직 순수함을 가지고 있으니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더 잘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 아이들을 많이 마주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점점 감정 문맹 수준의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얼마 전 6학년 아이와 <웡카> 원서를 읽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은 돈을 손에 쥐어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되묻는 장면을 읽으면서, 윌리의 기분이 어떠했을 것 같냐는 질문을 했다. 그 아이는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추가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너라면 기분이 어땠을 것 같냐고 다시 질문을 했다. 돈의 액수에 따라 다를 것 같다는 동문서답을 했다. 상황에서 등장인물이 느낄 수 있는 감정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사례가 제법 많다. 소중한 장난감이 망가져서 의자에 어깨를 쭉 늘어뜨리고 앉은 아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이야기를 읽어주기 전 그림만 보면서, 아이의 모습을 보고 그 아이의 감정 상태가 어떠할지 추측해 보자고 했다. 어떤 아이들은 아파 보인다고 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실망한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모르겠다'라고 했다. 그림 속 아이의 표정을 살펴보라고 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 보인다 정도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대답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였다.
평소에도 상대의 감정을 살피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본다. 친한 친구 둘이서 수업을 들으러 오는데, 한 친구가 앞에 다녀온 수학학원에서 문제를 잘 못 풀어 늦게 마쳤다고 했다.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아이의 표정에서 풀이 죽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함께 수업 듣는 친구가 눈치 없이 장난을 쳐댔다. 늦게 온 만큼 더 늦게 마쳐야 한다는 둥, 수학을 못해서 어쩌냐는 둥 놀려댔다. 친구의 장난에 기분이 나빠진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 친구에게 '이제 좀 그만해!'라는 식의 표정을 전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전혀 개의치 않고 까불거렸다. 결국 아이는 짜증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라고!!" 서로 무안하고 어색한, 이른바 갑분싸가 되었다.
등장인물의 기분을 추측하지 못하거나 친구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이런 아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일상의 경험들을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와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할 때도 많다. 그러니 책을 읽고 자신의 경험을 끌어와 이야기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화가 날 때 왜 그런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뭔가 기운이 빠지는 기분인데 그것을 실망이나 좌절 같은 어휘로 연결해서 표현하지도 못한다. 마음의 소리를 들을 기회를 가져보지 않아서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왜 그런 감정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고, 적절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선을 읽어낼 수 없다.
또한 진정한 의미의 친구보다는 경쟁상대로 인식하도록 가르침을 받은 경우도 많다. 경쟁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감정적 거리를 최대한 멀리 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상대가 어떠한 상태이든 '나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상대방의 감정은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나약함을 뜻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기도 하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워 상대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까지도 외면하도록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풍성한 감정 표현 능력을 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좋은 방법이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종종 글 밥이 거의 없고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책을 가지고 수업을 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를 읽었다. 비발디 사계 중 '여름'을 들으며 떠오르는 여름의 단상들을 담은 그림책이다. 음악을 들려주고 그림을 읽으며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마음껏 그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에 제목을 붙여보라고 했다. 서로의 그림을 돌아가며 보면서 느끼는 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감상문을 썼다. 50분의 수업이었지만, 평소에 '모르겠다' '좋다' 두 마디를 주로 쓰던 아이들의 입에서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름에 폭우가 쏟아지면 자신의 심장이 우르르 쾅쾅 소리를 내며 무서워서 비명치는 소리가 비발디 곡에서 들렸다는 아이도 있었고,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진 축제 현장 속에서 꺄악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아이도 있었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읽어낸 것이다.
감정이 메마른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법을 모르거나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꾸준하게 아이들에게 그림책으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이성도 물론 중요하다. 논리적이고 판단을 잘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기준을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성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 이성에 감성 한 스푼을 담아야 현명해질 수 있다. 상황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적절한 표현을 할 줄 알아야 사리분별 잘하는 현명함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으로서 먼저 갖춰야 하는 것이 어쩌면 이성보다는 감성이지 않을까?
학습용 책 읽기가 아니라 생각하고 표현하는 책 읽기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수업을 계속 기획하고 진행 중이다. 점수로 결과를 만들면 홍보효과도 훨씬 크고 수업 준비도 더 수월할 거라는 걸 너무 잘 안다. 하지만 20년 입시영어강사를 하면서 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몸소 느꼈다. 인간미 폴폴 나는 아이들이 차세대 리더감이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감성을 먼저 키워주는 선생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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