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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곰 Apr 25. 2023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계란 주먹밥

작은 음식도 정성을 담아 최고로 해주고 싶던 그녀의 마음


너는 ‘나의 장손’

우리 모두 각자 고유의 이름이 있지만 애칭이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로 지근거리에 있는 지인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애인이나 동네친구, 그리고 가족들이 애칭을 자주 사용하는 대상입니다. 그중 가족들이 자주 사용하는 애칭에는 주로 귀여운 표현들을 많이 쓰입니다. ‘강아지’, ‘우리 이쁜이’ 등 사랑의 의미를 가득 담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께서 자주 불러 주시던 애칭이 하나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좋아하셨던 나의 애칭은 ‘우리 집 장손’이었습니다.


제가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대여섯 살 무렵부터 할머니께서는 주구장창 저를 장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즈음 일찍 세상과 유명을 달리했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린 손자가 집안의 기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셨을까요. 큰 아들이 떠난 집안에서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을 까요.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그 애칭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금 나이가 들고 군대를 갈 무렵에는 그 호칭이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니께서 가지고 계시는 나에 대한 기대감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며 이제는 기운이 점점 줄어들고 계시는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서는 다른 감정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는 시야가 조금 넓어지고 할머니와 좀 더 깊은 대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인데요. 대화를 통해 들여다본 손자에 대한 애칭의 근원지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의 가장이 되었던 아버지. 기골이 좋으셨던 아버지는 건강해 보이는 외향과 달리 몸 안에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병세를 이겨내기 어려웠는지 갑작스럽게 젊은 나이에 두 아들들을 남긴 채 세상과 영원한 안녕을 나누었습니다. 아직 한참의 나이의 아들을 보낸 할머니의 아픔은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걷어내고 어린 손자가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 주길 바라셨을지 모릅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나이를 제가 맞이하였습니다. 그 무렵에 할머니와 둘이서 식사를 하며 식탁에 않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제 손자가 커서 진솔한 대화를 할 수가 있었고, 아직 할머니가 건강하여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던 소중한 시간들. 당시 할머니는 이따금 저를 부를 때 아버지 이름을 대신 부르곤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애써 그걸 정정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몇 번이고 잘못 호명하는 것을 들으며 할머니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같이 체감해 보았습니다.


이제 할머니께서는 연세가 너무 많아 귀가 안 들려 원활한 대화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저를 보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우리 집 장손’ 왔냐며 반가워하십니다.



‘할머니의 스페셜 도시락, 계란주먹밥’

자기 자식 중요하지 않은 가정이 있겠냐만은 위와 같은 이유로 할머니께서는 저와 제 동생을 정말 끔찍하게 아끼셨습니다. 옛날 분이라 특히 먹고 입히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셨는데요. 요리를 정말 잘하셨던 할머니께서는 이북 출신이셔서 특히 북한 음식들을 정말 맛깔나게 잘 만드셨습니다. 제가 정말 너무나도 먹어대서 조금 있으면 굴러 다닐 수 있을 때에도 ‘먹고 죽은 귀신이 떼깔도 좋다’며 잘 먹는 손자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수많은 음식들을 해주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할머니 음식은 바로 ‘계란 주먹밥’이었습니다.

 

지금에 비하면 제가 어릴 적이었던 30여 년 전에는 먹을 것이 그리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여행을 떠나면 과자가 아닌 집에서 삶은 달걀을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꺼내던 시절.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소풍을 가게 되면 모두의 도시락에는 온통 비슷한 음식이 뿐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고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을 보면 열 명 중에 열명은 김밥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김밥은 각자의 가정을 닮아 있었습니다. 각자의 부엌 사정에 따라, 입 맛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 김밥들은 그 가족의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자식들이 돋보이길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나 봅니다. 간혹 특별한 김밥을 싸 온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맛살이 들어간 김밥이라던지, 당시에는 꽤 비쌌던 치즈가 들어갔던지. 이 정도만 되어도 이미 남들과는 완벽하게 차별화된 우월한 김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반 다를 것 없는 김밥이었을 텐데 당시에는 그런 김밥 맛 한번 보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어깨가 으쓱 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도 제 도시락은 단연코 군계일학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김밥은 물론이고 남다른 특별한 도시락을 하나 더 챙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계란 주먹밥이었습니다. 한입 크기로 가볍게 돌돌 말아 튀김옷을 곱게 입은 주먹밥. 아이들이 생전 처음 보는 계란 주먹밥을 먹어보고자 제 주변으로 몰려들면 스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너네 집엔 이런 거 없지?’ 소설 동백꽃에서 점순이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요.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님까지 오셔서 ‘이건 뭐니?’ 하며 하나 집어 가면 나도 모르게 우쭐해졌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30여 년이 지나 햇살이 가득 식탁에 내려쬐던 여유로운 어느 일요일, 문득 와이프에게 계란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새벽같이 일어나서 김밥을 말고 계란 주먹밥을 굴리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소풍을 가기 위해 들뜬 마음으로 아침 일찍 잠에서 깨면, 이미 어른들은 저희가 먹을 음식들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쪼르르 옆으로 가서 만드는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그 자리에서 먼저 먹어보고 싶어 대기를 걸어보곤 했습니다. 새 둥지에 있는 아기새들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달라 하듯 한치도 옆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어찌나 옆에서 열심히 있었는지 그때 눈대중으로 보고 기억나는 장면들이 생생하여 레시피를 복기할 수 있었습니다.


계란 주먹밥을 만들려면 우선 밥을 하고 볶은 야채를 넣습니다. 그리고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동그란 주먹밥 모양으로 만듭니다. 후에 밀가루에 돌리고 계란물을  입힌 다음 다시 빵가루를 고르게 입혀줍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입니다. 요리를 직접 하다 보니 당시에 받은 할머니의 크나큰 사랑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쉼 없이 계속해서 김밥을 싸고, 주먹밥을 만들고.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이었을까요.


이제 귀가 안 들리셔서 원활하게 대화하기 어렵다며 전화하는 것을 피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다소 이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인생은 짧고 저에게 할머니를 뵐 수 있는 시간은 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오늘 한번 더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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