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마(不問馬), 사람을 먼저 묻다.

학교 ,논어에 스며들다.(3-2)

by 최성조

어느 날 퇴근하는 길, 왕복 2차선 정도 되는 작은 도로의 반대편에서 갑자기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뛰어나오는 바람에 다가오는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급정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다행히 차량이 아이를 발견하고 급정거를 한 덕분에 아이는 차량에 부딪히지 않았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주저앉아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 반대편 인도에 서 있던 나는 얼른 건너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운전자가 급하게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 운전자가 매우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나는 횡단보도도 아닌 차도에 아이가 갑자기 뛰어들었으니 놀란 운전자가 아이를 심하게 질책할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아이를 보자마자 운전자가 건넨 첫마디는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이 말이었다.

무단횡단을 하는 아이의 잘못으로 큰 사고가 날 뻔 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넘어진 아이에게 다친 곳은 없는지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그 한마디가 너무나도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나 아이를 질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달려간 내가 머쓱할 정도로 그 운전자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서 병원에 가야 하지 않는지, 부모님의 연락처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물어보는 것을 보며 나는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공자님 집의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조정에서 물러 나와 그 사실을 알고 말했다.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느냐?”

그리고 말에 대해선 묻지 않으셨다.

이 구절은 사람을 가장 우선 가치에 둔 공자의 인본주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구절로 유명하다. 당시에 말의 가치는 아주 높았다. 말 한 마리가 노예 몇 명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말은 일반인들은 가질 수도 탈 수도 없었다. 적어도 대부(大夫) 이상의 신분의 사람에나 허용된 교통수단으로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었다. 여기서 공자가 말한 ‘다친 사람’은 아마도 마구간 일을 하는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재산 가치가 높은 말보다 사람의 목숨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공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구절이다.

내가 초임 교사로 남녀공학 일반고에서 근무하던 때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들은 한참 에너지가 넘쳐나는 때라 운동을 해도 상당히 과격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학생부에서 학생생활지도 업무를 맡고 있었기에 점심 식사를 마치고 생활지도도 할 겸 산책도 할 겸 운동장 주변을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운동장 한쪽의 농구장에서 아이들의 비명이 들렸다. 얼른 달려가 봤더니 농구 골대 아래 한 아이가 쓰려져 있었고 그 아이의 손에는 농구 골대의 림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 몇몇은 농구대의 기둥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나보다 먼저 달려오신 체육 선생님을 향해 아이들이 변명처럼 말을 쏟아냈다.

“쌤, 쟤가요 덩크슛을 한다고 해서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농구 림이 부러졌어요.”

“쟤가 매달렸는데요, 농구 골대도 넘어질 것 같아서 저희가 급하게 잡았어요.”

상황을 보니 한 아이가 덩크슛을 하겠다고 농구 골대에 매달렸고, 아이의 무게로 인해 농구대가 앞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순간 다른 아이들이 농구대의 기둥을 잡는 바람에 농구대가 앞으로 쏟아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농구 골대에 매달려 있던 림이 떨어지면서 아이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아 아이는 죄송한 표정으로 금방 일어났다.

나는 무엇보다도 아이가 다치지 않았을지 계속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내 귀에 들리는 말 때문에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이 농구 골대가 얼만지 알아? 내가 체육 시간에 그렇게 매달리지 말라고 말했어? 안 했어? 하여튼 말을 안 들어요. 선생님 말을 안 듣는 새끼는 다쳐도 싸!”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물론 아이가 웃으면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만, 평소에도 아이들이 몇 번이나 농구 골대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주의를 주고 지도했음에도 똑같은 장난을 또 한 것에 대해 화가 나서 한 말씀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크게 다칠 뻔한 학생에게 응당 먼저 했어야 할 말은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니?”라는 말이었어야 했다.

다친 데는 없냐는 말 대신 혼이 나고 있는 아이에게 나라도 물어봐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아이에게 말을 건네려는 순간

“너, 이 새끼들, 여기 있는 새끼들 다 같은 놈들이니깐 농구 골대는 너네들 부모님이 물어내는 거야. 알았어?”

이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농구 골대가 넘어져 학생이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그때 이 선생님은 뭐라고 말했을까?

농구 골대를 물어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의 표정은 확연히 바뀌었다. 농구 골대가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아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부모님께 가서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하는 걱정 어린 표정이 너무나 안돼 보였다. 아이들 표정을 보는 나는 아이가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인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라도 그 선생님께 농구 골대가 부러진 것은 그 아이가 매달려서 그렇다기보다는 농구 골대가 그 전부터 튼튼하지 못했던 탓이고, 오히려 농구대가 앞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잡아서 큰 사고를 면하게 했던 친구들을 칭찬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아이가 괜찮은지,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보건실에라도 옮겨 확인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날로 농구장은 노끈이 둘러져서 농구대가 수리될 때까지 사용이 중지되었다. 다행히도 농구대의 수리비는 학생들 부모에게 청구되지는 않았고, 학교 예산으로 수리가 되었다. 나는 농구 경기에서 선수들이 멋진 덩크슛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때의 장면이 떠오른다. 특히 아이가 넘어져 있는 장면이, 아이들을 혼내고 있는 체육 선생님이 아니라 농구대 밑에서 무기력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선생님은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안위부터 걱정을 할 것이다. 학교는 그 어떤 공간보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고,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함을 선생님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체육 선생님은 정말 드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그 일은 지금도 나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의 ‘첫마디’를 예민하게 살핀다.

이후로도 학교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이 다치는 사고를 많이 겪었다. 그런데 내가 인천국제고에서 만난 교장 선생님 한 분은 항상 사고가 발생했음을 보고하러 가면 늘 하시는 첫마디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사고를 보고하러 가는 나도 마음이 좋지 않다. 그리고 교장실에 가서 보고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급한 상황이 수습되고, 크게 다친 아이도 없기 때문에 교장실에 가서 구두보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아이가 심하게 다친 긴급 상황이면 휴대전화로 보고를 했을 테니)

그래도 “그래서 아이가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이 한마디를 들으면 좋지 않았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무엇보다 아이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고, 나의 대처가 그래도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내가 만약 장학사에서 학교 관리자로 전직을 하게 되고, 선생님들로부터 사고 발생의 보고를 받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라도 나는 제일 먼저 이 말을 떠올릴 수 있는 관리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아이가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야 15년 전 농구대 밑에서 무기력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 믿는다.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느냐.”

공자의 그 말처럼, 나 역시 어떤 자리에서든 아이의 안부를 묻는 첫마디를 잊지 않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 그 첫마디 속에, 내가 지키고자 하는 교육의 철학이 담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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