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미래인가 비용인가
세계관,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가수는 누구일까? 여러 답변이 있겠지만, 나는 ‘에스파’를 꼽고 싶다. 독보적인 ‘광야’라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사회의 갈등과 화합, AI와 인간 등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던 그룹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이 에스파를 설명하는 가장 주된 키워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에스파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광야 세계관을 잠시 접어둔 채, 현실로 돌아와 하이틴을 표방한 음악을 내세웠다. 에스파 뿐만이 아니다. 세계관으로 대표되던 SM과 하이브의 신인 그룹들 조차 최근에는 세계관과 거리를 둔다. 뉴진스, 보이넥스트도어, 라이즈는 곡마다 다른 컨셉과 이야기를 다룰 뿐, 하나의 세계관 아래 일관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3세대 아이돌의 포문을 열었던 ‘엑소’는 케이팝의 지각 변동을 불러일으켰다. 다인원 그룹의 대세 편승은 물론,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케이팝에 이식했다. 외계 행성에서 온 초능력자들이라는 황당하리만치 새로웠던 엑소는, 어느 순간 대중에게도 익숙해졌다. ‘엑소’ 다음으로 케이팝의 왕좌를 이어받았던 ‘방탄소년단’은 훨씬 다양한 세계관 활용을 보였다. 세계관만을 위한 영상을 따로 제작하거나, 세계관을 담은 소설을 적는 것이 그 예시이다. 그렇게 세계관의 활용은 케이팝의 필수 요소처럼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 대형기획사의 그룹이라면 더욱 그랬다. 광야로 대표되는 SM의 세계관과 천사, 뱀파이어 등 인외존재를 키워드로 내세운 독특한 하이브의 세계관은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렇게 세계관은 케이팝에서 주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
이런 세계관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내러티브를 수반한다.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기획 의도나 중심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면, 일회성의 단순 메시지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비슷한 주제나 메시지를 더욱 깊이 있게, 입체적이게 그리고 다면적이게 전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 시장에서 사라졌다는 건, 아이돌 그룹이 던지는 메세지의 깊이와 입체감이 떨어지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4세대 걸그룹들은 여전히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소 단순 반복되는 관습처럼 느껴질 뿐 깊이감이나 그룹만의 특별한 감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관은 어째서 사라졌을까? 질문의 답은 단순하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투자 대비 효율이 적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그럴싸한 내러티브를 만들고, 그를 반영한 영상이나 글을 만드는 데엔 생각보다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투자의 효과가 미비해진 것이다. 그리고 투자 대비 효율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결국 소비자에 있다. 대중문화의 소비자인 대중이 그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엔 그에 매력을 느끼는 코어 팬덤의 수 역시 줄어든 모양새이다. 세계관의 존재가 당연한 것이 되면서, 신선함을 잃은 것도 문제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 전반적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고 피곤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깊이 있는 음악과 아티스트를 원치 않는 흐름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관이 아이돌 시장에서 사라진 주된 원인이라 생각한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한국 사회의 특성상,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 것이 주류가 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아왔다. 즐겁기 위해 태어난 것은 즐거움을 전하는 것이 최대의 소명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그런 시선 하에 대중문화가 하나의 주류 산업으로 자리잡고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것도 그다지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기에 세계관은 위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피로감을 호소하는 대중에게는 쓸데없이 무겁고 진중한 소재가 될 수도 있고, 분명한 의견을 가진 대중과 아티스트의 세계관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메시지가 상충되면 거센 비난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 역시 세계관을 기피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냉정하게, 제작자 입장에서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당연히 단기적으로 이득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세계관이 단순한 비용 낭비에만 그칠까? 정말 효용 가치가 없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룹과 장르의 미래 면에서 세계관은 분명히 도움이 된다. 첫째, 장기적으로 세계관은 그룹의 브랜딩에 도움이 된다. 세계관을 가진 그룹일수록 키워드나 컨셉을 각인시키기 쉬운 것은 물론이고, 추후에 컨셉을 변화시킨다 하더라도 개연성을 가지기 쉽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예시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조금 더 빠르다. 컨셉의 변화 주기가 짧고, 변화의 폭의 고저도 완만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팬덤은 변화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였다.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가진 세계관과 고유의 스토리가 주는 힘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장르 흥망의 면에서도 세계관은 필요하다. 케이팝이라는 정의가 계속해서 모호해지고 있는 지금, 세계관은 케이팝을 정의할 수 있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물론 세계관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케이팝의 본질은 ‘다채로운 컨텐츠’에 있기 때문이다. 케이팝은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다. 일종의 종합 예술처럼, 다른 영역의 예술을 가져와 음악에 이식했기 때문에 ‘장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입장에서, 세계관의 역할은 분명하다. 영상, 글, 그림 등의 다채로운 컨텐츠를 파생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케이팝의 미래 경쟁력과 정체성 유지의 면에서, 세계관은 분명히 핵심 역할을 한다.
비용과 리스크를 감수하고 흐름을 거스르는 데엔 언제나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세계관을 만들고자 한다면 설득해야 할 사람이 수많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산업의 중심에 있는 제작자라면,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당신이 만들고자 하는 그룹에, 세계관은 정말로 필요하지 않을까?
By. 이하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