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 Iver, Deftones, Dijon, FKA twigs 외
광글 : 요즘의 주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들을수록 점점 더 음미하게 되는 앨범이다. 20년의 회고록을 쓴 작가가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것처럼 [SABLE, fABLE]은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여는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Bon Iver의 지난 발자취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앨범은 제목 그대로 SABLE과 fABLE이라는 두 개의 장으로 나뉜다. SABLE에서는 초기 Bon Iver를 상징하던 미니멀한 겨울의 정서와 어두운 고독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담백한 어쿠스틱 기타와 조심스럽게 흐르는 신스, 절제된 보컬을 중심으로 차갑고 고립된 감정이 최소한의 사운드로 표현된다. 그러나 fABLE에 접어들면서 앨범의 결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R&B/소울/가스펠 요소가 본격적으로 스며들며 20년 간 이어져 온 고독과 슬픔은 보다 밝고 따뜻한 감정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i,i], [22,A Million]에서 선보였던 과잉된 신스 사운드와 글리치 텍스처가 다시 등장하지만 이전처럼 우울과 불안을 증폭시키지는 않는다. 이제 그것들은 불안함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라 여러 감정을 하나로 모으는 긍정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변화가 아니라 한 아티스트가 20년의 여정 끝에 도달한 완숙미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SABLE, fABLE]은 Bon Iver가 자신의 정체성 전체를 되돌아보고 재정의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검은 중심을 둘러싼 따뜻한 살구색의 앨범 표지처럼 Bon Iver는 지속되어 온 부정적인 정서를 지우기보다 그러한 감정들을 감싸 안은 채 조금 더 따뜻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래서 이 앨범은 쉽게 이해되기보다는 Bon Iver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던 사람일수록 점점 더 많은 공감이 드러나는 작품으로 남는다. 자신의 전 경력을 하나의 앨범 안에 녹여내면서도 새로운 감정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올해 가장 설득력 있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플린트 : 가장 Deftones 같으면서도, 가장 Deftones가 잘하는 것을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보여준 이번 10번째 앨범에서는, 40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주름살 없이 매끈매끈하면서 세련된 중년미가 느껴진다. 다루기 힘든 무겁고 거친 메탈, 그리고 날 서 있고 흩어져 있는 슈게이즈라는 두 사운드를 장난감 다루듯 손쉽게, 그러면서도 말끔하게 다룬 사운드가 가장 인상적이다. 드랍 튜닝 속 저음으로 붕붕거리는 리프와 그 위 자글자글한 노이즈는 서로를 배려하듯 알맞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공간감이 헤집어진 정도도, 보컬이 묻힌 정도도, 드럼이 때려 박히는 정도도 딱 적당히 알맞다. 비록 두 장르 본연의 강렬함은 느껴지진 않지만, 대신 풋내기들에게선 볼 수 없는 이 적당한 완성도는 오히려 듣기 편안한 깔끔함을 남긴다. 초창기의 뉴메탈, 그리고 [White Pony]로 대표되는 전성기로 슈게이즈를 거쳐오며 쌓은 그간의 내공이 느껴짐과 동시에, 어쩌면 커리어 전반의 정중앙에 위치한 감도이니만큼 수많은 명반 사이에서도 Deftones를 대변할 수 있는 앨범이 될 수 있는 작품이 오랜만에 등장한 듯하다. 든든히 쌓인 시간을 시대에 뒤처지지 않은 감각에 담아내기도 했다. ‘ecdysis’에서는 곡 제목처럼 뉴메탈 시기를 탈피한 2020년대 메탈코어의 미래지향적 사운드가 툭툭 치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들은 과거에만 얽매여 있지 않다. 특히 전체 커리어 중 가장 연하고 장조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작금의 슈게이즈에 대한 "멘헤라식" 해석처럼 절규가 아닌 무기력한 허망감이란 재해석이 보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나른한 분위기를 뒤집는 ‘milk of madonna’부터의 활력은 오히려 패기와 소년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구시대가 아닌 현재 씬을 구성하는 트렌디한 아티스트의 작품 같게 하는 이러한 부분에서, 여전한 탐구열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 생명력이 주는 감동을 느껴볼 수 있었다. 한 층 더 뜯어보면 이러한 감성 안에 Deftones의 서사가 묻어나는 팀원에 대한 추모 등의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이렇게 젊으면서도 또 중후함이 있는 Deftones에게 영포티가 아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우러러볼 수 있는 어른의 멋이 보인다.
태휘 : Dijon의 [Baby]는 나에게 짧지만 강렬한 폭풍과 같았다. 그러나 이 폭풍은 나에게 즉각적인 충격보다는 먼저 의문을 남긴다. 처음 이 앨범을 들었을 때 떠오른 감정은 강렬함이라기보다, 과연 이 앨범을 알앤비나 네오 소울이라 불러도 되는지에 대한 망설임에 가까웠다. 이는 장르 특유의 매끈한 질감이나 그루비한 느낌을 내는 것이 아닌, 거칠고 불안정한 사운드들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첫인상일 뿐이다. 앨범을 곱씹을수록 망설임은 오히려 전율로 바뀌었다. 특히 ‘Baby’는 Prince가 가장 관능적이던 시기의 부드러운 발라드를 연상시켰다. 모든 것을 감싸는 베이스 위에서 과부하된 기타 사운드가 날카롭게 파고들고, 중간중간 배치된 노이즈와 글리치 사운드는 듣는 사람을 끊임없이 낯선 방향으로 이끈다. 곡 후반부의 사이키델릭한 올드스쿨 비트는 앞선 사운드와 전혀 다른 무드를 제시하여 긴장감을 조성한다. 또한 ‘Higher’는 짧게 끊어지는 피아노 리프 사이 단편적인 멜로디가 중심을 잡는 가운데, 층층이 쌓이는 코러스 보컬은 가스펠을 연상시키어 웅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과부하된 리버브 사운드가 등장하며 흐름을 깨트리듯 귀를 압도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외에도 ‘Referee’에서는 락적인 에너지 속에서 왜곡된 사운드를 펼치는가 하면, ‘My man’에서는 사이키델릭한 팝 스타일을 빌려오기도 한다. 이처럼 Dijon은 80년대의 네오 소울뿐만 아니라 사이키델릭, 베드룸 팝, 락 등과 같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잡음, 왜곡된 사운드와 같이 의도적으로 사운드를 훼손하고 뒤튼 듯한 실험적인 시도들로 자신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개척해 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 앨범 안에서 휘몰아친다는 점은 정말 폭풍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미 전 작품 [Absolutely]는 핵심적인 협업자 Mk.gee와 함께 Dijon의 미학을 각인시킨 출발점이었고, 이번 [Baby]는 그의 미학이 메인스트림에서도 유효함을 증명한 결과물로 읽힌다. 하지만 폭풍은 단 한 번만 오지 않는다. 또 언제 들이닥쳐 풍경을 바꿔 놓을지 모른다. 우린 그저 다가올 폭풍에 몸을 맡길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된다.
샐리 : 굳이 파헤치려 들지 않아도, 저절로 반응하게 되는 음악이다. 몽환적인 전자음과 댄서블한 리듬을 주축으로 한 직관적인 사운드는 빠르게 감각을 자극하며, 마치 레이브 공간에 온 듯한 몰입감을 준다. 속도감 있는 비트와 킥 사운드의 강렬한 에너지를 극대화한 ‘Love Crimes’와 잘게 쪼갠 하이헷 리듬과 구간별로 강약을 세밀하게 조율한 킥을 교차시킨 ‘Predictable Girl’은 이 앨범이 댄스 음악의 장르를 넘어서 긴장과 이완의 타이밍을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특히 ‘Sushi’에서는 하단부를 강하게 타격하는 킥 사운드 위로 간드러지는 보컬을 얹어서 나아가다가, 후반부에 화려한 볼룸 음악을 배치하는 역동적인 전환으로 흐름을 단숨에 뒤집는 노련함까지 선보인다. 이는 [EUSEXUA]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된 방향성을 한층 더 선명하게 다듬은 결과이기도 하다. 전작이 댄스 음악과 아트 팝을 결합한 클럽 사운드에 대한 탐색과 실험에 가까웠다면, 본 작은 강화된 댄스 리듬과 전자음으로 그 실험을 보다 명료하고 세련된 형태로 구현해 냈다. 장황한 설명 없이도 몸이 먼저 움직이게 만드는 순간을 정확히 계산해 낸 감각은, 독특함과 실험성으로 대표되던 그녀의 사운드가 테크노와 드럼앤베이스 같은 댄스 음악의 문법 안에서도 직관적이고 설득력 있게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교한 프로덕션과 가녀린 목소리는 댄스 리듬의 추진력을 선명하게 밀어 올렸고,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이분법적 해석을 무력화했다. FKA twigs는 자신의 음악을 낯섦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몸과 감각이 먼저 반응하게 만드는 경험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단순한 변주가 아닌, 자신의 음악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낸 놀라운 성취다.
TEN : 리틀 믹스 데뷔 후 14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제이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솔로 앨범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증명했다. 먼저 이 앨범에서 돋보이는 것은 곡의 흐름에 따라 목소리의 힘을 즉각 바꾸는 제이드의 보컬 활용이다. ‘IT Girl’에서는 도발적인 랩과 자신감 넘치는 톤으로 무대를 장악하고, ‘Plastic Box’에서는 한층 차분하고 눌린 목소리로 불안을 표현하는 식으로 곡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뛰어난 보컬 역량 외에도 이 작품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2025년을 통틀어 완성도 면에서 더 뛰어난 앨범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을 올해의 명반으로 꼽는 이유는 그룹 출신 솔로가 흔히 마주하는 우려를 말끔히 지워낸 수작이자, 필자처럼 해외 팝이 낯선 케이팝 리스너들에게 최적화된 팝 입문서이기 때문이다. 특히 트와이스와 르세라핌의 작업에 참여하며 케이팝 신과 교감해 온 그녀의 이력은 리스너의 심리적 문턱을 낮추며, 앨범을 한층 친숙하게 만든다. 웅장한 신스팝에서 파격적인 일렉트로닉 비트로 급전환되는 ‘Angel Of My Dreams’의 구조가 케이팝의 '믹스팝' 문법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에 짧고 직관적인 구성으로 이지리스닝의 결을 살린 ‘IT Girl’, 그리고 ‘FUFN’ 후반부에서 직선적으로 꽂히는 고음처럼 케이팝 팬들이 익숙하게 사랑해 온 확실한 킬링 포인트들이 곳곳에 배치되며, 앨범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진입 장벽이 높은 해외 팝에 쉽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들에게 [That’s Showbiz Baby!]는 굳이 해외 팝의 방식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앨범이며, 사운드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 순간 해외 팝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르망 : 현대의 대중음악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전 세계에 시간 동기화가 가능해지고, 국경의 제약조차 없어진 현대에는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새로운 세대, Z세대는 이런 환경 조건에서 과도하고 불안정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습득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으며, 그들은 성장하여 다양한 정보가 합쳐진 새로운 음악을 조금씩 세상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Jane Remover의 [Revengeseekerz]가 그 예시 중 하나다. Jane Remover는 커리어 내내 다리아코어, 하이퍼팝, 슈게이즈, 이모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 장르들은 단순히 아티스트의 변덕이 아닌 하나의 궤로 엮여 있다. Z세대의 노스텔지어를 그들의 방식대로 풀어보려는 방법론이다. 그렇게 그녀가 만들어 놓은 작업물들을 통해 생겨난 경험치는 이번 앨범에서 만개했다. 다리아코어의 서브컬쳐, 하이퍼팝의 신디사이저 활용, 슈게이즈의 과잉, 이모 록의 정신이 Skrillex의 방법론과 만나며 만들어진 이번 앨범은 일명 디지코어라는 장르로서 발현되었다. 이런 특징들은 8번 트랙 ‘Dancing with your eyes closed’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현된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신스 아르페지오, 과도하게 큰 808 베이스와 덥스텝이 가지고 있는 사운드의 변칙적인 움직임이 서로 뒤섞이면서 발생하는 클리핑은 마치 성능이 안 좋은 컴퓨터가 고사양 프로그램을 억지로 구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디지털 열화는 그들의 세계에서 중요했던 서브컬쳐 캐릭터들과 함께 청자에게 노스텔지어를 선사함과 동시에 극단적인 도파민을 부여하고 그로서 그녀와 그녀의 세대들이 느낀 복잡하고 파괴적인 현대 시대상을 그대로 전달한다. 물론, 이 앨범이 Nirvana의 [Nevermind]가 해냈던 것처럼, 비주류 음악이 주류 음악을 이겨내는 경이로움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과잉과 파괴의 미학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 언더그라운드 씬에 막대한 영향력을 퍼뜨리고 있다. 언젠가는 Jane Remover가 퍼뜨린 그 맥시멀리즘이 대중 눈앞에도 찾아오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엉얼 : 올해 음악 시장은 음악이 점점 더 빠르게 소비되고, 트랙의 러닝타임 역시 짧아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앨범이 바로 Lil Tecca - [DOPAMINE]이다. 앨범은 전반적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트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볍게 재생해도 자연스럽게 귀에 스며드는 사운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초반 디스코 힙합 ‘Favorite Lie’와 808 베이스가 강조된 트랩 기반의 ‘Boys Don’t Cry’와 같이 앨범의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사운드의 밀도가 점차 깊어지는데, 특히 마지막 트랙 ‘Tic Tac Toe’에서는 Ken Carson과 레이지 장르까지 이어져 마지막에 도파민의 끝을 표현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청각적으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DOPAMINE]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가볍게, 또는 깊이 감상할 수 있고, 수록곡 또한 몇 초 안에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하며 현재 음악 시장의 소비 방식과 정확히 맞물린다. 이와 동시에 첫 트랙 ‘Dark Thoughts’부터 마지막 트랙 ‘Tic Tac Toe’까지 트랙 간의 연결이 끊기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트랜지션은 개별 곡의 소비가 아닌 전체적인 앨범 감상으로 이어지는 기능을 하며 앨범을 끝까지 감상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DOPAMINE]은 빠르게 소비되는 음악 시장의 흐름과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악 스펙트럼까지 확장하며 대중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으며, 앨범의 완성도는 물론 Lil Tecca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새겨 넣는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베실베실 : 수백 장의 앱스트랙트 힙합 앨범을 들으며, 나에게 있어 좋은 앱스트랙트 힙합 앨범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윤곽이 잡히는 듯하다. 바로 '얼마나 아름답게 난해하냐'다. 대선배 MF DOOM이나 지금 시대의 전설 billy woods와 Earl Sweatshirt가 그러했듯,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과격한 실험성과도 다르고, 양산형 앱스트랙트 아티스트들이 내뱉는 목적 없는 로파이와 드럼리스들과는 다르게, 온갖 샘플과 작법이 산재해 적당한 난해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난해함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이 느껴져야 한다. 랩퍼 R.A.P Ferreira와 프로듀서 Kenny Segal이 합작한 본 앨범은 이 기준의 완벽한 모범 사례다. 앨범은 재지한 프로덕션 위주로 흘러가지만, 거친 드럼이 여러 형태로 뭉개지는 ‘prince of peace’를 시작으로 온갖 난해한 전개와 예측할 수 없는 사운드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 와중에 ‘by the head’를 리드하는 현악기라거나, ‘apricity’ 말미에 스산한 앰비언트 위로 브라스가 프리 재즈처럼 연주되는 예술적인 순간을 들으면 비록 R.A.P Ferreira의 호평받는 가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언정 Kenny Segal의 사운드만으로도 이미 이 앨범은 충분히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상반기 결산에서도 말했지만) 작년의 예측이 무색하게, 2025년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아티스트들이 앱스트랙트 힙합 명반을 경쟁하듯 내놓은 해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이 앨범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MIKE가 옛 고전 팝을 샘플링하고, Earl Sweatshirt가 한결 밝은 음악을 들려주고, billy woods가 호러코어를 접목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앱스트랙트 힙합을 들려줄 때, R.A.P Ferreira와 Kenny Segal은 재즈라는 앱스트랙트 힙합의 가장 고전적이며 정석적인 작법 중 하나를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앱스트랙트 힙합의 저변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직하게 기존 뿌리를 지켜주는 아티스트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누군가는 경계를 허물고 누군가는 중심을 잡으니, 앱스트랙트 힙합의 미래는 앞으로도 밝을 것만 같다.
JEN : Rochelle Jordan은 [Through the Wall]에서 밤을 노련하게 장악하며 청자를 사운드 안으로 몰입시킨다. 그녀는 에너지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인위적으로 고조시키지 않는다. 치찰음과 숨결이 뒤섞이며 존재감을 낮춘 보컬은, 밀려오는 비트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끝내 폭발하지 않는다. 곡을 노련하게 멈추며 청자에게 'One more time'을 유도하는 등 자극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몰입시키며 밤을 점유한다. 보컬을 부르기보다 공간을 채우듯 퍼지며, 흐름을 밀고 나간다. 다양한 장르를 유기적으로 엮어낸 프로덕션 역시 인상적이다. 비교적 단조로울 수 있는 딥하우스의 흐름에도 DnB, 저지 클럽, 디스코 등과 같은 변화를 주어 균열을 만들며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형상을 분해해 안개처럼 번지는 신스는 보컬을 감싸고, 베이스는 리듬을 단단히 받친다. 그 결과, ‘Crave’, ‘Words 2 Say’, ‘Eyes Shut’ 등 장르적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들조차도 세련되게 하나의 밤공기 안에 스며든다. 이는 여러 프로듀서가 참여했음에도 앨범의 톤이 끝까지 유지되는 이유다. [Through the Wall]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에너지를 내세우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사운드 사이에 숨겨둔 정교함으로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청자를 자연스레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4년 만에 앨범으로 돌아온 Rochelle Jordan의 노련함이 드러나는 감각, 그 자체로 남을 것이다.
루영 : 13가지의 언어를 통해 여성성의 힘과 신앙심을 노래하고, 다양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의도를 모르더라도, [LUX]는 음악 그 자체로도 듣는 이를 감화시키기 충분하다. 런던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섬세하고 웅장한 관현악 연주와 오페라를 듣는 듯한 Rosalía의 유려한 보컬은 수록곡 하나하나를 부족함 없이 가득 채우면서도, 중세 유럽의 신전에 와 있는 듯한 숭고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바이올린 연주와 신스 사운드가 조화를 이루며 웅장한 타격감을 주는 ‘Reliquia’, 날카로운 랩과 베이스드럼이 어두운 분위기를 극대화시키는 ‘Porcelana’, 격정적인 연주와 합창, Rosalía와 Björk의 보컬, Yves Tumor의 목소리가 차례로 등장하며 서사를 형성하는 ‘Berghain’, 부드럽고 경쾌한 왈츠 박자에 스페인의 전통 음악 플라멩코를 응용한 ‘La Perla’, 그의 음악적 뿌리인 플라멩코를 그대로 재현한 ‘La Rumba Del Perdón’ 등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의 트랙이 번갈아 등장하는 구성 역시 청각적 몰입감을 잃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종교 영화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의 앨범은 '음악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한다'는 상투적인 말에 비로소 진정성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또한 라틴팝의 흥행 템플릿이나 고평가를 받았던 기존의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라틴 문화권의 음악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LUX]는 '2025년 올해의 앨범'의 칭호를 받을 만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
제트 : 누가 맥 밀러의 새로운 음악을 2025년에 또다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2020년 발매된 그의 첫 번째 사후 앨범 [Circles]는 높은 완성도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기에 새로운 사후작을 마주하는 것에는 기대와 함께, 피할 수 없는 전작과의 비교와 창작자의 부재로 인한 완결성에 대한 우려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Balloonerism]을 마주한 순간 그런 의문은 무색해졌다. 미리 설계된 앨범이었던 만큼 창작자의 의도는 또렷하게 녹아 있었고,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11년 전 한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앨범은 충분한 예술적 가치로 다가왔다. 불안함과 평온함이 공존하며 떠다니는 사운드 조각은 마치 2018년 이전의 맥 밀러와 이후의 맥 밀러 그 사이 경계를 거니는 듯했다. 트랙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오르간 코드의 단순한 나열 위 서서히 쌓이는 보컬 하모니의 ‘DJ’s Chord Organ (feat. SZA)’이나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질감의 ‘Do You Have A Destination?’, ‘Stoned’에서는 그만의 실험적인 사운드 속 어딘가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특유의 달콤하고 따뜻한 무드를 더해내는 몽환적인 일렉 피아노의 ‘Mrs. Deborah Downer’, 서정적인 피아노 위 담담한 래핑과 가성 코러스가 어우러지는 ‘Funny Papers’에서는 평화를 좇는 그의 갈망이 느껴지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엇비슷한 질감과 선명하지 않은 장르 아래, 사운드가 비교적 좁은 범위를 맴도는 것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일관된 사운드의 틀은 오히려 조금씩 삐걱거리고 어긋나는 순간을 두드러지게 만들며, 삶과 죽음 사이를 사유한 그의 시선과 함께 앨범 전반을 하나의 정서로 자연스럽게 묶어냈다. 그렇게 그가 남긴 감정과 질문은 시간이 흘러 홀연히 우리 앞에 떠올랐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그의 과거와 마지막 모습이 이 음악을 더욱 깊게 받아들이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이후의 음악을 들어본 지금이기에 이 앨범은 단순히 슬픔이나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당시 맥 밀러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마주하고 있었는지, 그 심정이 어떤 음악적 방향으로 이어졌는지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 앨범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진실한 감정과 솔직한 표현, 그리고 불완전함마저 자신의 언어로 끌어안는 그만의 음악적 감각에 있다.
Noey : 수년째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Water From Your Eyes(이하 WFYE)의 행보는 인디 록이라는 익숙한 토양 위에서 가장 낯선 꽃을 피워내는 과정과 같다. 90년대 그런지와 레트로 사운드를 소환해 현대적 감각을 덧입히는 접근법은 동시대 인디 록 밴드들과 궤를 같이하는 듯 보이지만, WFYE는 한 발 더 나아가 독보적인 차별화를 이뤄낸다. 29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속 6곡의 보컬 트랙과 4곡의 인스트루멘탈 트랙을 배치한 구성부터가 그렇다. 오프닝 ‘One Small Step’을 비롯한 인스트루멘탈 트랙들은 앨범의 강렬함 사이에서 숨 쉴 틈을 만드는 동시에, 앨범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묶어내는 정교한 장치로 작용한다. 이 같은 구조 안에서 빛을 발하는 WFYE의 강점은 ‘Life Signs’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전형성을 무심하게 비트는 태도에 있다. 강력한 그런지 인트로로 시작해 랩에 가까운 보컬과 그루비한 베이스라인을 지나, 몽환적인 코러스로 급반전되는 전개는 이들이 장르의 경계를 얼마나 거침없이 넘나드는지 증명한다. 다이나믹한 레이어가 겹쳐지는 ‘Spaceship’이나 디스코 리듬을 비튼 ‘Playing Classics’ 역시 마찬가지다. 곡마다 몰아치는 급격한 전환은 산만함보다 앨범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되어 밴드가 가진 예측 불가능한 정체성을 강화한다. 이처럼 과감한 전개가 설득력을 얻는 건 결국 집요할 정도의 디테일 덕분이다. 기타 하모닉스나 묘하게 일그러지는 신스 라인처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만드는 작은 장치들이 곡 구석구석 숨어 있고, 덕분에 들을 때마다 새로운 소리가 들리는 재미가 있다. 실험적이면서도 난해해지지는 않는 균형, 정교한 디테일이 맞물려 2025년 가장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화인애플 : 사운드나 장르적으로 큰 틀은 유지하면서도 이전보다 깊은 감정을 보이며 한차례 성장했음을 알렸다. ‘Elderberry Wine’에서의 컨츄리 기반의 따뜻한 질감이 '이별의 후폭풍'을 이야기하며 겉은 차분하지만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그려내기도 하고, ‘Wasp’의 날 선 보컬과 하드한 락 사운드가 '말벌이 발을 쏜다'는 가사를 만나 감정에 더욱 힘을 싣기도 한다. 또한 전작을 알고 있는 청자라면 프론트우먼 개인의 성장도 발견했을 것이다. [Bleeds]가 전보다 절규하며 한층 더 느낌을 주는 가운데, 특히나 [Raw Saw God]의 ‘Bull believer를 오열한다고 묘사한다면, [Bleeds]의 ‘Wasp’는 더욱 절규한다고 묘사할 수 있는 점도 흥미로운 포인트가 됐다. 이처럼 ‘Bull Believer’를 사랑하던 청자는 한층 더 하드해진 ‘Wasp’에서 발전된 기량으로 절규하는 하츠맨의 성장 궤적을 따라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청자는 이러한 스펙트럼을 그들의 음반명처럼 '피 흘린 시간'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전보다 더욱이 절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겪어온 출혈과도 같은 시간이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프론트우먼과 기타리스트의 이별도 그 감정의 깊이를 더하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밴드 멤버들의 여러 경험과 고통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보다도 깊게 잠식되는 Wednesday를 만날 수 있다면 '아픔을 겪고 오라'고 모순된 응원을 전하는 것이다.
Billy woods - [Golliwog]
Blood Orange – [Essex Honey]
BRUIT ≤ - [The Age of Ephemerality]
Caroline – [caroline 2]
Dijon – [Baby]
Gingerbee – [Apiary]
MIKE – [Showbiz!]
R.A.P Ferreira & Kenny Segal - [The Night Green Side of It]
Rosalía – [Lux]
Stratford Rise – [Stratford Rise]
by 고멘트 <주간 신보 리뷰>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