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시절 형성된 예민한 성격
난 엄마가 없다. 아니, 친엄마가 어딘가에 살고는 계시겠지만 누군지 모른다. 가족들 말씀으로는 백일즈음 아빠와 이혼 하시고 날 데리고 살다가, 내가 혼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아빠가 할머니 곁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 후로 아빠는 재혼을 하셨고, 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새엄마가 친엄마인줄 알고 살았다.
새엄마가 친엄마가 되는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난 어렸을때부터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엄마는 나에게 차갑고 무서운 사람이었고, 나와 동생을 차별했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그런 나를 보며 불쌍하게 여겼는지 나에게만 유독 많은 사랑을 주셨다. 그로인해 엄마는 더욱 나를 차별했다. 할머니와 고모들의 관심이 있었기에 내가 살 수 있었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는 듯 느껴졌다. 채워지지 않았다. 나와 관계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누구 하나라도, 아니 잠시라도 나를 싫어할까봐 불안에 떨며 살았다. 난 겉으로는 한없이 착하고 유순한 사람이었지만 속은 점점 예민해졌고, 완벽주의적 성격이 형성됐다.
#2. 워커홀릭, 나쁘게 말하면 일 중독
수능이 끝난 후, 운이 더럽게 안좋았다. 나보다 점수가 더 높은 학생들이 하향지원으로 많이 지원한 학교에만 원서를 넣었던 바람에 모두 떨어졌다. 결국, 전문대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나와 같은 학교에 원서를 넣고 떨어져 같은 전문대, 같은 과로 온 학생이 5명이나 있었다. 좋은대학 나와서 성공하는 길이 나의 전부라고 여겼기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살 부터 몇년동안 방황이 시작됐고, 우연히 국비지원으로 편집디자인을 배우게 된 후로는 새롭게 희망을 가졌다. 디자이너로 큰 성공을 꿈꾸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실력이 늘지 않아, 가지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서 국내에서 가장 디자인을 잘가르쳐 준다는 학원을 찾았다. 낮에는 콜센터 알바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을 다니느라 하루에 3~4시간씩 밖에 못잤다. 그 시절에 사귄 남자친구가 독종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완전히 디자인에 인생을 걸었다. 회사에 다니던 어느날은 결과물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새벽4시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 성공을 위해 달린게 아니라 성공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달렸다.
브레이크가 없는 삶이었다.
#3. 담배에 빠지다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인생을 한탄할때, 한숨 한번 쉬는걸로는 해결이 안됐다. 운동을 하거나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푸는 건 너무 건강한 해결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나에게 음흉하고도 우울해보이는 흔적 하나를 남겨놓고 싶은 충동이랄까. 담배를 물면 내가 가장 우울한 사람 같았고, 처절한 인생을 이악물고 해쳐나가는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학창시절에도 언제나 나는 착하고 순한, 바보같이 여린 아이라는 인식이 붙어다녔다. 그게 늘 불만족스러웠다. 성인이되면서 내면의 강한 성격들이 겉으로 나왔지만 그보다 더 쎈 나를 만나고 싶었다. 담배를 피우는 그순간 만큼은 깡패도 두렵지 않을 만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흡연하는 모습에 놀랄때마다 뭔가 모를 쾌감이 있었다.
#4. 정신분석치료, 혼돈의 도가니
암을 확인하기 2년전, 우연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다. 선생님의 강연은 친구가 이야기하듯 전문적이지만 쉬웠고 재미있었다. 이후에 무료 집단상담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바로 참여신청을 했다. 집단상담내내 나는 흐느껴 울었다. 나의 내면을 꺼내어 사람들과 이야기 한건 처음이었고, 공감과 위로가 너무나도 따뜻했다. 난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졌고 치료를 받고 싶었다. 선생님께 따로 유료 상담을 신청했고, 격주로 2시간씩 정신분석치료가 이루어졌다.
현재의 나는 대부분 과거의 나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이어짐에 따라 저항이 극심했다. 상담을 여러차례 그만두려고도 했고, 가족들에게 모진말까지 하며 처음 내안의 분노를 만났다. 나에게 조울증이 있다는 것, 왜이렇게 성공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게되며 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2년동안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