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 좋은 날

이유 없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어느 기분 좋은 날에

by Grace Lee

보통 그날의 공기는 집 밖으로 나온 뒤 아침 1시간 안에 결정된다. 그런데 왠지 예감 좋은 날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버스를 놓치지 않는 날, 예고 없던 소나기에 마침 가방에 우산이 있는 날, 그리고 지하철에 날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날 나는 하루 종일 이유 없이 마음이 여유롭고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특히나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은 자주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소액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아침 지하철을 타자마자 내 앞의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서 계시는 ㅡ당연히 잽싸게 자리를 차지할 거라 생각했던 ㅡ어느 중년의 아저씨도 오늘은 웬일로 침착하게 서 계셨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은 나의 자리였던 것처럼, 왕위를 숭고하게 비워두는 것처럼 누구도 나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신났다. 사실 삼사십 분쯤 그냥 서서 가도 되는데, 이게 뭐라고 기분이 째진다. 그날 하루는 오롯이 나를 위해 흘러간다.

이런 날에 난 점심시간에 후배들에게 커피도 쏘게 되고, 귀찮게 쌓인 업무도 별다른 짜증 없이 기꺼이 하게 된다. 프린터의 종이도 슬쩍 먼저 채워놓고 주변 먼지도 괜스레 한번 더 닦아본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퇴근하곤 한다. 미처 기대하지 못한 소소한 기쁨이 나의 하루를 이만큼이나 행복하게 할 수 있다니. 새삼 놀랍다.

우리 각자에게 불행만 가득하다면 세상은 정말 삭막하고 각박할 것이다. 이런 코딱지만 한 행운들도 조금씩 일어나 줘야 그 마음으로 기꺼이 베풀고 전하게 되고 그 기쁨의 눈덩이가 구르고 굴러 따뜻한 세상이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나만의 작은 철학을 정립해본다.

그러나 애석한 것은, 이 깜찍한 행운조차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난 가끔 서점에 들러 좋아하는 책을 여러 권 산다.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에게 깜짝 선물을 한다. 어떤 날은 야근한 동료의 책상에 힘내!라고 적은 커피를 올려 둔다. 또 아주 가끔은 꽃시장에서 꽃을 한 아름 사 와서 회사 사람들과 나눠 꽂기도 한다.

일 년 내내 한 번도 지하철에 못 앉아 오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꾸 좋은 일이 코딱지만큼도 안 일어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바로 내가 행운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면 된다. 전혀 기대치 못한 소소한 행운의 나비효과는 커피 한잔의 무게보다 훨씬 크다고 믿기에, 행복한 세상 만들기에 나의 정성을 일 그램 보탠다. 나 그렇게 누군가에게 네잎클로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다 쓰고 갑자기 생각나는 익숙한 시 한 편이 있어 아래에 적어둡니다. 학창 시절 참 좋아했던 시인데 감회가 새롭네요.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