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입사지원서를 보내지 않았다

떠나려니 보이는 마음들

by Iro


오늘까지 마감인 곳에 지원서를 보내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익숙함을 하루 더 연장하고 싶었던 걸까. 또 다른 탈락으로부터 자존감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어젯밤, 베개가 머리를 뉘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니 그동안의 얼굴들이 떠올라서다.


딱딱한 업무용 채팅창이었지만, 이모티콘 하나로 미소 짓게 해 주던 S

깐깐한 듯 하지만, 일 하나는 늘 정확하게 해 주던 E

늘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해 주시던 Y

어떤 일도 온화한 미소로 품어주시던 K

A와의 일들로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준 B와 O


돌아보니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분들이 많았다. A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나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에게는 돈보다는 시간이 소중하다. 그런 면에서도 이곳은 괜찮은 편이었다. 급한 일이 생기면 비교적 자유롭게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기를 떠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나르시시스트 A.

다른 하나는 그를 지켜주는 상사다.



책을 읽다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내용이 있어 옮겨 적어 본다.


미국 정신의학협회가 발행하는 <DSM-5>에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9가지 진단기준이 나와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중요한 존재로 느끼는 것, 남들의 선망을 과도하게 바라는 것, 특권 의식, 공감 결여, 대인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행동 등이 포함되며, 이 9가지 중 5 이상을 충족하면 인격장애로 진단된다.

『우리가 지혜라고 부르는 것의 비밀』


추가로 찾아보면,

자기 목표 달성을 위해 타인을 착취, 공감 결여, 타인을 질투하거나 타인이 자신을 질투한다고 믿음, 오만하고 거만한 태도나 행동이 있다.




어쩜 이렇게 잘 설명해 놓았는지 놀라울 정도다. 물론 진단이 내려질 정도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닐지 모른다. 어린 시절 양육 방식 때문이었는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어떤 사건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의 이유도 있었을 거다. 한편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녀가 오히려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하는 상사가 있다. 앞에서 소리 지르는 게 아니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럴수록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이용한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모든 장점에도 상쇄되지 않을 만큼 내게는 문제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더 이상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비난하며 지내고 싶지 않다.


고마운 사람들을 마음에 간직한 채, 조용히, 그리고 감사히 이곳을 떠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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