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집. 벌떡 몸을 일으킨다. 아이들과 함께 또 잠이 들었나 보다. 오분만 옆에 누워있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이제 야근 타임이 시작되었다. 요새 몰아보고 있는 중국 드라마를 켜고 이어폰을 연결한다. 꼼꼼히 세수를 하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건조기의 빨래들을 한아름 안아 거실로 데려온다. TV 덕분에 거실은 불 켜지 않아도 잘 보인다. 열심히 개고 있는데 드디어 반가운 최애씨가 귀가했다.
"많이 먹었어? 오늘은 별로 안 마신 거 같네. 얼른 씻고 쉬어."
"나, 눈탱이 맞은 거 같아."
"왜, 뭐 잘못 샀어?"
"아니, 지하철역 앞에 어떤 아줌마가 차비가 없다고 만 원을 달래서 드렸는데 생각해 보니까 아닌 거 같네."
"음. 택시 타시려나보다. 에휴 "
동네에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종일 앉아 오백 원 걷으시는 할머니와 지하철역에서 택시비 달라는 아줌마가 상주하신다. 이성적인 사람은 사기를 안 당한다더니, 오랜만에 눈탱이를 맞고 왔다. 빈틈 보인 최애씨가 반갑기도하다.
"거봐, 아무리 잘나고 이성적이여도 당한다니까. 보이스피싱 조심하자."
이제 그만 생각하고 씻으라 토닥인다.
최애씨는 소심하고 얼음장같은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도 있다. 과거 A형의 소심한 나는 O형과 만나야 천생연분인 듯 말하고는 했다. 어디를 봐도 A형인 최애씨는 본인은 O형이라며 나름 쿨한 척 행동을 했고, 너무나도 대문자 A인 그와 결혼을 했다.
뭐든지 꾸준한 최애씨는 하나만 파는 스타일이다. 피파 게임만 몇 년을 하는 중이고, 봤던 드라마는 자막을 켜고 몇 번이나 다시 본다. 배우들의 미세한 얼굴 근육 움직임이 보인다나. 오빠 정말 대단하다는 말에 '그래서 너만 좋아하잖아'라고 툭 치면 튀어나오듯 기계적인 말을 내뱉는다.
만만다행히 우린 소심할 때가 겹치지 않는다. 본인과의 카톡창을 무음으로 설정했다며 충격 받은 표정을 짓거나 다툰 후 너는 왜 미안하다고 안 하냐며 작게말하는 모습을 보면 완벽한 T인데 나에게 F가 전염된 것인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카톡 상단 고정, 알림 켜기, 미안하다고 백 번 말해주기로 피드백을 바로 해준다.
돌아보면 큰 다툼 없이 잘 지내는 건 서로 존중하고 행동 수정이 빠르기 때문이 아닐까.
허나, 소통이 안 될 때가 아직도 많다는사실. 덜 살았나.
저녁 약속이 많은 최애씨는 맛있는 안주를 자주 포장해 온다. 집에 엄청 잘 먹는 와이프가 있으니까. 아직 부족하신지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산다. 늦게까지 일하시는 편의점 알바나 주인아저씨께 포장해 온 안주를 나눠 드리고 뿌듯해하는 남자. 혹, 택시 기사님이 같은 동네에 사신다고 하면 장인, 장모님과 아시는 분일까 싶어 음료를 사드리기도 한다. 친정 부모님은 다른 동네로 이사 가신 지 2년이 넘었는데 말이다. 이런 사랑스러운 오지라퍼를 봤나.
사진: Unsplash의Everton Vila
웬만한 큰 일에는 덤덤하고 그의 지나가는 의미 없는 한마디에 상처받는 나란 여자는 이상하게도 아들에게는 그러지 못한다. 강약약강인 것 같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럴 수 있지'로 셀프 합리화하고 그와 함께 곤히 잠든 아이들 옆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