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어린 말 한마디에 크나큰 추진력을 얻는다
"오복아, 엄마는 너무 속상해. 웬 줄 알아? 네가 말 안 들을 때면 TV 때문이다, 졸려서다, 아파서다 이렇게 다른 데서 이유를 찾고 있어. 그냥 네가 잘못한 건대도 말이야. 너 이제 곧 3학년이야. 엄마가 계속 핑곗거리를 찾으면서 너의 행동에 대해서 억지로 합리화해야겠어? 몇 살까지 될 거라고 생각해? 어른되서도? 미안한데, 엄마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 그렇게 못해. 오복이도 이제 나이가 두 자릿수 될 거자나." 오복이 귀에 한 단어라도 들어갔을까. 덜 자란 엄마는 언제든 눈물 흘릴 기색으로 또 쓸데없는 감정과 착잡한 마음을 드러내본다. 랩을 뱉어내는 듯하기도 하다. 표정의 경직이 느껴진다.
"엄마, 미안해요. 아까는 죄송했어요. 생각하고 행동할게요."
역시나 아이는 외운 대사 마냥 짤막하게 대꾸한다.
최애씨는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유일하게 나를 잘 읽는다. 퇴근하면 썩어있는 나의 낯빛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만 차마 말할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또 애를 잡고 싶지 않으니까.
그저 "엄마 말씀 잘 들어. 나한테 바로 전화해. 혼나는 거 습관들이면 안 돼"라고 말한다. 고분고분 잘 듣고 있는 오복이를 보니 자연스레 한숨이 나온다. 뒤로 돌면 금세 잊고 신나 하는 모습이 미리 보이기 때문이다.
한참 놀다 쭈뼛이 다가오는 오복이. "엄마, 안아주세요, 손 잡아주세요."라며 내 손을 만지작 거린다. 이럴 때면 어색한 포옹으로 답한다. "엄마, 등도 토닥여 줘야죠." 하며 내 손을 잡아끌어 토닥이는 시늉을 한다. 아이도 감정 없는 엄마의 스킨십을 느끼는 것이다. 미안하게도 가끔 진심으로 안아주지 못할 때가 생기고 있다. 본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엄마의 감정 따위는 무시할 때 말이다. '나이도 더 먹어놓고 애한테 서운해하나'라는 따끔한 생각만으로는 도저히 커버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내 하얀 볼을 꼬집고 감싸 안으며 아이에게 따뜻한 가슴의 온기를 전해본다. 그러고는 서로 단단한 관계를 유지하자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약속을 해본다. 나의 괴로움을 아이에게 표현한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말이다. 나에게 주어진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인 지금이 바로 인생의 베스트 파트인 것을 다시금 인지해본다.
글을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당시의 내 기쁨과 슬픔을 공부하며 잠깐은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나중에 육아에서 독립하는 날, 초라해진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글을 써야 할 이유를 떠올리며 굳은 의지가 상승한다.
유치원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오팔이는 브런치 발행을 위해 퇴고, 퇴고하는 엄마의 곁으로 다가와 다리를 베고 눕는다.
"엄마, 배고파요. 밥 언제 주세요?"
"조금만 더 하면 돼. 5분?"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엄마가 나 이해해 주니까, 나도 엄마를 이해해 줄 거예요."
내가 뭘 이해해 줬길래 6살짜리에게 배고픔을 참을 정도의 이해를 받는 건가 궁금했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오팔이는 노래 후렴 부분을 반복적으로 흥얼거리며 한쪽에 엎드려 끄적인다.
"엄마, 선물이에요." 종이 건물이라며 세워서 봐야 한다는 오팔이. 매일 받는 선물이지만 오늘따라 아이의 따뜻함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견뎌내 줘서 고맙다는 걸까.
"엄마, 울어요?" 자주 눈물 흘리는 엄마를 확인하는 오팔이. 예상과 달리 눈물 대신 함박웃음을 확인한다. 고맙게도 위로와 응원을 전하려던 게 맞나 보다.
오팔이가 아기 때였다. 다정한 오복이는 오팔이를 바라보고 안아주며 매일 같은 말을 했다.
"오팔아, 넌 감동이야." 고작 네다섯 살이었던 아이의 행동과 말은 내 마음이 환해지는 기억들 중 하나이다. 맞다. 너희들은 감동이다.
아이들이 부모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많이 웃게 해주는 추억을 선물해야 함을 잊지 말자. 나야.' 또 한 번 스스로를 향한 약속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