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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MU Nov 27. 2023

첫 만남을 기억하라

스스로 다독이며 사는 나는 어른이다

같은 생각과 목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 중 하나라 생각된다. 지난 토요일이 그랬다. 서울역 어딘가, 그곳에는 글 쓰는 게 좋고, 팔자 고치고 싶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려는 그들이 있었다. 길던 짧던 시간이 중요치 않았다. 뭐가 됐든 헤어짐이 아쉽기만 했고, 그날의 만남은 앞으로의 삶에 영양제를 맞은 것처럼 든든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복이에게 보이스톡이 온다.

"엄마, 친구들 잘 만나고 있어요? 밥은 먹었어요?"옆에서 오팔이도 거드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알고 있다. '엄마, 언제 와요? 어디예요? 빨리 와요'라는 말들을 아이들은 참고 있는 것을.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자석은 한동안 엄마 자석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엄마는 내 친구야."라던 오팔이는 A4용지를 휙 꺼내어 뚝딱 편지를 써 무심히 무릎에 놓고 간다.


그녀의 편지는 행복을 전한다.


"엄마는 이제 내 언니야."



그렇게 엄마에서 친구 이제는 언니가 되었다. 

부둥켜안고 떨어지지 않는 오팔이를 바라보면 우리의 만남이 기억난다.


오복이와 눈썰매를 타고 온 다음날 아침, 이마와 코에는 아픈 여드름이 올라와있었다. 꽤나 통증이 있었지만 팩으로 진정이 되겠거니 하고 하루를 보냈다. 통증은 더 심해졌고, 아무리 봐도 여드름이 아닌 것 같아 피부과를 방문한다.

"대상포진입니다."

"네? 저 고등학생 때 등에 대상포진 있었는데요?"

"대상포진은 재발 안 하는데 이상하네요."

어쨌든 얼굴에 있던 여드름은 대상포진이었다.

의사는 주사와 약물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고, 본인 이마의 흉터를 보여주며 나도 남을 거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동의를 했고 그날부터 치료는 시작되었다. 의사는 이마 세 군데와 볼 두 군데, 콧등 위에 주사 한 대를 조금씩 나눠 맞혔다. 물론, 독한 약도 처방받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최애씨는 홍콩 출장 중이었고, 친정엄마는 축 쳐져있는 딸을 위해 오복이와 시간을 보내주고 계셨다. 

쉬고 있던 나는 별안간 이상한 촉이 느껴졌고, 벌떡 일어나 곧장 약국으로 가 임신 테스트기를 구입한다. 두 줄이었다. 순간, 심장이 땅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공포 영화를 본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는 내가 먹은 독하다는 약들과 주사가 계속 떠오르고 무언가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나는 임신으로 면역이 약해져 대상포진이 재발한 것이었다. 왜 나는 임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치료에 동의를 했을까. 기쁨과 환호로 가득 채워야 하는 시간을 울고 있는 엄마를 보고 뱃속 아가는 얼마나 속상할까. 똑부러지지 못한 나를 미워하고 원망해 본다. 하지만 차마 울 수 없었다. 화장실 밖에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는 엄마가 계시니 말이다. 


저녁이 되어 오복이가 잠들고, 혼자되었을 때 마음 정리를 하고, 최애씨와 영상통화를 했다. 그의 얼굴이 화면에 뜨자마자 기다린 듯 눈물이 쏟아진다. - 그러고 보니, 오복이 임신 확인했을 때도 최애씨는 4주간 교육을 가 있었다. 어찌 됐든 출산을 함께했으니 되었다.-

"왜 그래? 응? 무슨 일 있어?" 누워있던 최애씨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오빠, 나 두 줄 나왔어. 나 때문에 아기 아프면 어쩌지." 뭉개진 발음을 최애씨는 용케 알아듣는다.

바로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만 했다.


이미 내일 계획은 자연스레 세워져 있었다. 정신없던 와중에 산부인과 예약을 했으니까 말이다.

다음 날, 피부과에 치료 중단의 말과 함께 먹은 약과 주사 관련 출력물을 손에 들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걷는 10분의 시간, 눈이 쌓인 길 위에는 소리 내 울며 눈물범벅인 얼굴을 한 내가 있었다. 


엄마와 어른으로서의 한 걸음 나아감이 겁이 났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저 무섭고 무서웠다. 최애씨와 통화를 하며 심호흡으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어제까지 화장하고 잘 돌아다니던 나는 몇 시간 만에 탱탱 부은 얼굴의 임신부가 되어있었다. 콧등에 파인 흉터를 보니 벌 받은 것만 같았고, 상담을 시작하는데도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답하는데 큰 노력이 필요했다. - 아직도 상담자의 당황한 표정을 기억한다.- 괜찮다며 위로를 받았고, 의사 선생님께서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실 거니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걱정 마세요, 괜찮아요." 전문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들으니 이번에는 감사함의 눈물이 흘렀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흐릿했던 눈앞이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오복이와 가족에게 오팔이를 알리며 이제는 '그녀'이기를 소망했다.


태어난 후, 몸이 아프거나 조그마한 감기라도 걸릴 때면 스멀스멀 죄책감이 찾아온다. 동시에 친정엄마도 생각난다. 여기저기 잘 부러졌던 나를 걱정하며 '엄마가 임신했을 때 입덧으로 먹은 게 없어서 그런가 봐'라고 지금도 말하는 우리 엄마가 말이다.

아픈 아이들 옆에서 자책할 때면 차디 찬 최애씨의 한 마디는 순식간에 늪에서 빠져나오게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단호한 목소리. 분명 기분 나빠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속상하게 쳐다보며 말하는 최애씨의 눈이 더 속상해 보인다.-생각해 보니 내가 엄마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야만 깨닫는 것들이 있다. 비록, 흉터남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 근육은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주어진 매일을 감사히 채워보며, 나보다도 몇 배 더 힘들었을 누군가에게 그저 견뎌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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