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신과 방문의 추억
지난 7월 15일. 아직도 날짜까지 기억한다. 공황이 왔다. 그것도 자다가 새벽에 깼는데 문득, 고질병인 어지러움이 몰려오면서 피가 머리를 한차례 쓸고 가는느낌이 났다. 어.. 이러면 안되는데, 내일 점심에는 시어머니생신잔치가, 저녁에는 엄마 생신잔치에 크루즈까지 타기로 예약을 해두었는데 또 어지러우면~!!! 하는 불안감이 밀려오자 갑자기 미친듯이 심장이 뛰면서 척추를 따라 찌릿한 느낌과 함께 소변이 마렵고 식은땀이 훅 나기 시작했다. 그 느낌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라고 하면 "나, 어떡해." 였다. 그 뒤에 눈물 이모티콘을 백만개쯤 붙여주면 좀 더 그 상황에 가까우려나. 그 시간은 실로 짧았다. 불행중 다행인것은 나는 늘 불안장애를 달고 살았기때문에 공황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닥쳐오는 즉시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분이구나!"알아 챌 수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이것이 이렇게 지나갈것이란걸 알았다. 5월부터 시작된 어지러움과 심계항진으로 MRI, MIA, 심전도, 24시간 홀터검사, 심장 초음파 심지어 목 척추 MRI등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한 뒤 지극히 정상이라는 결과를 받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몸의 문제가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이성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운 증세는 한 5분 정도 계속되었고 자가 일어나 각성이 일어난지라 이성은 더 제대로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었다. 마침 남편이 안방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던지라 바로 달려가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것이 내 최초의 유의미한 공황발작이었다. 그 이후로 본격적인 예기불안이 시작되었다. 예기불안이란 공황발작후 " 또 공황이 오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운 상태를 말한다. 사실 공황환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공황 자체보다 예기불안이다. 나의 경우는 한번 예기불안이 시작되자 시도 때도 없이 짧고 잔잔바리로 공황이 처들어오기 시작했다. 실제로 첫번쨰 공황처럼 강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이 또 오셨다는 불쾌한 느낌에 식은땀이 나고 혈압이 160으로 치솟고 현실감각이 사라지면서 정신줄을 부여잡는 상황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그 기저에는 "아, 또 지난밤처럼 그러면 어떡하지.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쓰러지면. 같은 사고가 깔려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려고 앞에 커버를 두르는 순간 또 불안하면서 식은땀이 났다. "어머. 머리를 금방 감고 오셨나봐요." 하는 디자이너쌤의 말조차도 꿈결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아...도저히 혼자서는 못 버티겠다, 정신과를 가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정신과는 카우치에 앉아서 "자, 어린시절을 떠올려봅시다." 와 같은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울면서 쏟아내는 것이다. 정신과 대기실에 앉아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하나. 어디서부터 풀어놔야하나 고민하는데 "김**님 들어오세요." 내 이름을 호명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본 진료실 내부는 당황스러웠다. 카우치나 은은한 조명따위는 없었다. 일반 내과병원과 똑같은 구조였다. 내 이야기를 5분쯤 듣더니 의사선생님이 말했다.
"전형적인 공황이네요. 약을 드릴테니까 드셔보시고 2주후에 오세요." 순간 내귀를 의심했다. 네? 이대로 끝? 이비인후과 선생님도 15분은 상담해주신것같은데 하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심지어 달력을 보던 선생님이 "아,2주후에는 제가 휴가를 가야하니 3주후에 뵙시다." 라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약을 얼마나 오랫동안 먹어야해요?" 물어보니 "최소한 6개월은 드셔야죠." 비타민C 처방하듯 가볍게 얘기하는 의사의 태도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 3주동안 나는 공황카페에도 가입하고 관련 책도 열심히 읽으면서 공황에 대해 공부했다. 불안장애일때는 몰랐던 공황의 세계였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약에 대한 거부감때문인지 약을 복용하고 난 뒤 더 어지러운것같았다. 거기다가 약을 먹고 나면 소화불량까지 찾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작용이었다. 거기다 항불안제인 리보트릴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깨고나서도 머리가 묵직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산균만 잘 못 먹어도 몸에 열이나는 내 예민함이 문제였다.
3주후 신나게 휴가를 보낸듯 얼굴이 벌겋게 탄 의사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선생님, 제가 공황에 대해서 공부를 했거든요. 그래서 인지치료라는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인지치료를 병행하면서 약을 줄여보면 어떨까요?"
"아. 그런걸 정보화라고하는데 공황환자들이 흔히 하는거예요. 계속 정보를 모으는거죠. 공부하지 마세요. 인지치료는 큰 효과가 없는데 정 원하시면 우리나라에서 하는 병원을 알려드릴께요. 저는 인지치료를 하지 않습니다."
공황이라는 병이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앓는 질병이니 별것 아닌것으로 느끼게 해주려는 배려였는지는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 같은 환자로 퉁쳐서 취급하는 의사의 태도에 상처받은 나는 다른 병원을 알아보았다. 어차피 정신과는 자기와 잘 맞는 의사와 약을 찾는게 급선무였다.
두번째 병원은 지인의 추천을 받아서 간 곳이었다.
"불안장애라면 약을 더 오래 먹어야해요. 지금은 일단 공황이 발병된 기억을 억눌러야하니 약을 더 쎄게 쓰셔야합니다. 저도 인지치료는 하지 않습니다."
약이 싫어서 약 뗴러 갔더니 이게 왠말. 모든 정신과에 카우치가 없다는건 그렇다고 치고, 인지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그리하여 세번째로 공황에 관련된 책을 쓴 저자를 만나러 강남까지 갔다. 이분은 그나마 인지치료에 관한 책을 쓰신분이고 실제 사례도 많이 겪으신분이라서 말을 하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이분도 인지치료는 정기적으로 인원을 모아 기수별로 진행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의료수가떄문이었다. 정신과가 보험처리가 되기 시작하면서 의사들은 더이상 그 정도의 진료비를 받고 정신상담을 해줄 시간도 여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그저 약을 처방해주고 그 약이 잘 맞는지 안 맞는지 증감해줄것인가 감약해줄것인가를 보는 것이 현대 정신과 의사들의 일이었던 것이다. 감기가 걸리면 내과에 가서 감기약을 처방받듯 마음이 아프면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으라...라는 말이 액면그대로 그냥 약만 처방받는다는 말인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다행히 세번째 선생님은 인지치료에 관한 내 생각을 수용해주셨고 내가 노력하는 모습에 큰 점수를 주셔서 두달만에 단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굉장히 드문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을 더 찾아뵙고 상담이라도 나눴어야했는데 너무 멀기도 했고 더이상 절박하지 않았던터라 9월 무렵부터 혼자 약없이 버티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내 마음은 불안과 걱정으로 요동치기 시작했고 5월 초에 마스크를 벗고 미용실에서 시술받은것이 내내 맘에 걸리더니 소화불량, 복통, 설사, 어지러움, 피쏠림, 심계항진이 어벤져스급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코로나시즌이 아니었다면 아. 또 시작됐네. 이거 뭐 이러다 말겠지 싶었겠지만 혹시 이증상들이 코로나? 라는 재앙적인 사고가 겹치자 겉잡을 수 없는 불안이 몰려왔다.
'아 어떡하지'곱하기 눈물 이백만개이모티콘의 상황이 다시 시작된것이다. 큰 공황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잔잔바리 불안이 자꾸 치고 올라와서 신경안정제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약 처방을 잘 해주지 않는다는 의사를 찾아갔다. 참 아이러니했다. 약처방을 하러 가는데 약처방을 안해주는 의사를 구태여 찾아가다니.
이 분은 30년정도 대형 대학병원에서 정신과교수를 하시던 분이었다. 한참 내얘기를 들어보시더니 공황이 다녀갔고 이미 스스로 잘 치유하고 있는데 약이 필요가 있겠냐고 하셨다. 의외였다. 지금 당장 급한데요? 못 견디겠는데요? 하니 코로나로 불안한건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불안하면 차라리 검사를 해서 불안을 잠재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셨다. 안다. 나도. 그러나 이성적으로 내가 코로나일리가 없는데 강박적으로 모든 신체증상에 코로나를 갖다 붙이는 내 자신을 설득하다보니 지쳤다, 또 검사를 한다 한들 그게 한번에 그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내자신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유증상자나 의심환자가 아닐경우 자비로 해야하는 검사비도 비싸다. 혹시 갔다가 확진자랑 접촉해서 없던 바이러스가 옮아오면 어쩌냐 기타등등 이유를 댔다.
"아. 그럼. 일주일만 더 지켜봅시다. 이미 제가 보기엔 공황은 지나갔어요. 지금 남아있는것은 건강염려증으로 인한 불안인데. "
다행히 집에 상비약이 있다고하니 선생님이 그걸 반쪽이라도 먹어보라고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서 그때도 여전히 불안하고 몸이 힘들다면 어떤 약을 쓸지 고민해보자고 했다. 약이란것에 너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먹으려 들지는 말라는 것이 선생님의 말씀이셨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작은 투명 비닐에 담긴 뭔가를 꺼내 보여주셨다. 하얀 알약이 들어있었다.
"우리 집이 송파인데..여기 강남까지 운동삼아 걸어오거든요? 그런데 오전에는 사람이 너무 없는 한적한 길이예요. 고혈압가족력이 있어서 기온이 올라가는 겨울철에는 이러다가 혹시라도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누가 날 발견해주지?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그런 생각이 드니까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고요. 그때 이후로는 그럴때 먹으려고 이렇게 항상 약을 갖고다닙니다. 실제로 먹은 적은 없지만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안심이 됩니다. 환자분도 아마 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질껍니다. "
"어머! 선생님도요?" 순간 30년 베테랑 선생님도 그런것에 불안을 느껴서 약을 갖고 다니시는구나 싶어 묘한 안도감과 동질감이 몰려왔다. 아.. 불안이란게 누구라도 느낄수 있는 것이구나. 나만 미쳐서 예민한게 아니었구나 싶으니 그 자체로도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약을 안 받고 싶었지만 먹고 싶어 처방 안해주는 선생님을 찾아뵜더니 결국 약을 안 주는 기기묘묘한 상황이 났다. 오늘밤은 또 어떻게 버티지.. 라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이런 결정장애 (코로나 검사 하러갈까, 말까) 역시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의사가 하라는대로 약을 받아먹고 믿고 따라가는것이 이런 질환에는 더 큰 도움이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를 기르면서 의사가 내려주는 처방이 최선일순 있어도 정답일순 없다는 것을 여러번 경험한 터였고 분석적이고 의심이 많은 나에게는 나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준다고 생각하는 의사를 찾는 것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의사선생님말씀대로 나는 다른 공황장애 환자들에 비해서 그리 심한편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너무 힘든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자살충동을 느껴본적도 없고 우울감에 사로잡혀 해야할일을 못하는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불안했던 잔잔바리 시즌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자다가 일어나서 심장이 입밖으로 나올듯 뛰는 증상이며, 소변을 보면서 힘이 풀리는 증상이며 모두 점차 가라앉았다. 물론 정신과를 다녀와서 심장내과를 가서 심전도와 24시간 홀터검사를 했고 코로나 검사까지 받았다. (결과는 당연히 음성이었다.) 그 와중에 생리가 끝났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다.
약 없이 또 이렇게 한 시즌을 보냈다. 약을 반드시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 얘기를 들어봐도 약을 먹으면서 다른 치료도 병행해서 나은 분들이 많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불안하면 상비약을 먹겠다는 마음도 있다. 다만 이것이 이렇게 죽을것같이 불안했던 증상마저도 결국 사라지고 말꺼라는 증거를 하나 더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