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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가가 삶을 바꾼다

삶 = 수면+일+"여가"

by 홍충희

우리 아빠.


내가 만약 엄마에게 우리 아빠가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엄마는 내게 되물을 것이다.


'느그 아빠마이(만큼) 단순한 사람 있나?'


단순한 사람.


목수이자 코딱지만 한 가구공장 사장님이었던 아버지의 삶은 어린 내가 보아도 지독할 만큼 단순했다.


일을 하는 평일엔


7:30 - 기상/ 공복에 믹스커피 한 잔 후 출근

9:00 ~ 18:00 - 가구 제작/ 잔업이 없다면 퇴근

18:30 - 퇴근 후 집 도착, 저녁 식사 및 세면

19:00~24:00 - TV

24:00 - 수면


주말은 더했다.


8:00 - 기상/공복에 믹스커피 한 잔

8:00 ~ 24:00 - TV (가끔 보다 못한 엄마의 사자후에 등산, 목욕 등의 일정이 추가되기도 한다.)

24:00 - 수면


아주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우리 아버지의 여가는 오로지. 오로지. 오로지!


TV. Television이었다.


만나는 친구도 전혀 없이, 약속도 없이, 그저 TV.


다프트 펑크의 Television Rules the Nation이라는 노래가 맞는지 어쩐 지는 몰라도

최소한 Television Rules My Daddy인건 확실하다.


아버지는 가장의 권한으로 TV 리모컨 채널권을 독점하셨다. 그 덕택에 나는 아버지의 채널 패턴을 곁에서 오랫동안 파악할 수 있었다.


7시 생생정보 - 8시 저녁시간 일일연속극 - 9시 뉴스 - 10시 드라마 - 11시 영화 채널에서 영화 보기


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평일 TV 시청 루틴은 지독히도 일정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가족이 각자 알아서 노는 세대가 아니셨고 아버지를 구심점으로 하여 가족이 나들이를 가는 형태였기에 그런 아버지의 여가는 가족들을 꽤 힘들게 했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로 인해 본인의 여가가 제한적이라는 현실에 불만이 크셨고 그 불만은 가끔씩 달아올라 부부싸움의 요소가 되곤 했다.


허나 과묵하신 아버지에게 끝내 드리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다.


그런 여가를 즐기는 아버지 마음은 어떠셨냐고.


행복하셨을까.


아니면

행복하다고 착각하셨을까.





이런 부모님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10년쯤 됐을 것이다.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분의 제안으로 부모님께 200평 쪼금 넘는 작은 땅을 매입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울산의 고운산 밑자락, 신불산이 훤히 보이는 땅은 순식간에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이런저런 사건 끝에 부모님은 작은 농지의 주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열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열정.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우리 아빠가 열정이라니. 열정이라는 단어와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전국에서 손꼽힐 사람인 우리 아빠에게 열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농지를 가꾸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으셨다. 아버지는 근처 축사에서 발효된 소똥을 헐값에 구매해 트럭에 실어 주말 내내 뿌리셨다. 종묘상에 들러 다양한 모종을 심으셨고, 여러 농기구에 대해 욕심을 부리시기도 하셨다. NPK 비료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셨고 연작피해, 병충해에 대해 공부하셨으며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못 다루는 스마트폰을 배워 인터넷 쇼핑도 간혹 하신다.


아버지의 열정 덕분이었을까?


부모님의 텃밭은 마을에서 꽤나 예쁘게 가꾸어진 땅으로 조금의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 혹은, 근처 유명한 대형 카페를 오가는 손님들이 가끔 발길을 멈추어 우리 밭에 대해 칭찬하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지금도 가끔 본가로 내려가면 우리 가족은 집에 있지 않고 농지로 향한다. 농지는 언제나 은은히 울려대는 벌들의 날개소리, 익어가는 포도와 꽃들의 향기로 달콤하고, 그것보다 더 무겁게 늘어선 녹음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가족은 간단히 농사일을 돕고 아버지가 직접 만들고 칠한 농막에서 갓 딴 상추에 고기를 구워 먹거나, 싱싱한 채소들로 전을 부쳐먹는다.


신불산 아래로 드리운 분홍인지 주황인지 모를 화려하고 눈부신 노을 속에서 우리 가족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행복임을 느낄 수 있다.


20180805 노란 꽃 포도 2.jpg 익어가는 포도




헌데 여기에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우리 가족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이 시점.


아버지의 커리어는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업체의 3 하청 업체에 해당하는 매우 영세한 하청 사업장을 운영 중이셨는데 수주를 담당하는 상위 하청업체가 아버지 회사를 흡수한 것이다. 인수합병과 같은 거창한 방식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폐업하면 아버지와 회사의 사람들을 계약직으로 고용해 주는 방식이었다.


아버지 당신의 손가락 4개를 바쳐서 일구었던 가구공장은 그렇게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아버지는 70세의 나이에 사장님에서 언제 잘려도 이상할 것 없는 하청업체 계약직 직원이 되었다.


신분은 불안하고, 수입은 줄었다.


그러나 아주 역설적이게도.


어머니는 인생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다 말씀하신다.

아버지께도 질문드려본 적 없지만 느낄 수 있다.

20180805 아빠 흑백.jpg 아버지

삶 = 수면+일+"여가"

아주 심플하기 짝이 없는 수식이다.

인간은 세 가지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


삶의 상수이자 우리의 노력 여부와는 거리가 약간은 있는 수면에 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어두자.


인간은 노동을 해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련의 노력들을 하고 일을 통해 얻은 산출물들을 여가 시간에 쏟아 삶의 만족감을 보강한다.


표현이 어려운데 아주 극도로 간단히 표현한다면

'일해서 남은 시간에는 쓰는' 방식이 대부분 인간의 라이프 패턴일 것이다.


문제는 이 여가에 대해서는 '현명히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꽤나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당장 서점에 달려가 자기 계발 서적란을 둘러보자. 삶의 세 가지 시간인 일, 수면, 여가 중에 어떤 것을 주로 다루는가? 절대다수의 책들이 일의 시간을 다룬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 함의 되어있는 현상이다.


"성공하고, 돈 많이 벌면 쓰는 건 다 알아서 할 거야."


이 함의는 틀렸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있는 증거다. 아버지는 돈을 가장 많이 벌던 시절, 자신의 여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리모콘만 붙잡고 계셨다. 오히려 수입이 줄고 신분이 불안정해진 지금, 아버지는 신불산 노을 속에서 헤엄치시며 흙냄새와 땀방울, 웃음으로 인생을 채우고 계신다.


우리는 커리어를 관리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이직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려한다. 그러나 정작 삶의 나머지에 해당하는 여가에 대해서는 '뭐 알아서 되겠지.'하는 마인드로 방치하곤 한다.


커리어의 성취가 삶의 속도를 보장한다면 잘 관리된 여가는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던질 질문은 단 하나.


지금, 당신의 여가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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