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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곤 Jan 05. 2018

[미국 여행] 끝장투어도 도움이 된다

미국, 워싱턴 D.C. (3)

나의 미국, 나의 캐나다

프롤로그 ― 워싱턴D.C. ― 나이아가라 ― 몬트리올 ― 퀘벡 ― 보스턴 ― 뉴욕

워싱턴 D.C. 편 : (1)/(2)/(3)




   새로운 만남이 많이 있었는가 하면 오랜 친구와 워싱턴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마침 멀지 않은 필라델피아의 한 대학에서 계절학기를 듣고 있던 고등학교 동기 T가 워싱턴에 놀러 오기로 한 것이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는 조금 다르게 주변 소식에 밝고 모든 일에 계획적인 사람이다. 눈치가 없고 주변에도 무심하며 계획이 흐리멍텅한 나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가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대학교 입시 때도 T가 선배들로부터 얻어온 정보며 노하우를 옆에서 주워들은 덕에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도 했다. 고마운 친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친구는 여행도 주도면밀하다. 최소 투자로 최대 효용을 얻어내는 끝장 투어리스트. 그게 바로 T다. 꼭 가보고 싶은 곳, 꼭 가봐야 할 곳을 최단 경로로 섭렵하는 스타일의 여행을 즐긴다.(지금도 그런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쩜 여행 스타일마저도 나와 반대다. 워싱턴을 당일치기로 '조지겠다'는 당찬 그의 포부에 하루 일정을 맡겨보기로 했다. 덕분에 나 혼자였으면 귀찮아서 포기했을 여러 장소에 가볼 수 있었다.


몇 주 뒤 뉴욕도 하루만에 '조졌다'


   시작은 워싱턴 기념탑. 멀리서 보면 그저 돌을 깎아 만든 거대한 기둥이지만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앤드류 가필드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친구들을 구해내던 바로 그곳이다. 외관은 시내 곳곳에서 여러 각도로 볼 수 있지만, 전망대는 내부가 협소해 아침 일찍 방문 예약을 하지 않으면 들어가 볼 수 없다. 오전 8시쯤 졸린 눈을 비비며 T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가니 벌써 줄에 서서 예약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에 필라델피아를 출발한 사람이 나보다 빨리 도착해있다니. 학교를 다니다 보면 2시간 거리 통학생보다 학교 앞 자취생이 지각을 더 많이 하는데, 딱 그 꼴이었다.


   확인증에 적힌 예약 시간이 되면 다시 탑 앞에 줄을 선다. 대기열 양 옆으로 연대표, 통계, 역사 설명 따위가 붙어 있는 건 여느 관광지와 매한가지지만 왠지 외국이라 들뜬 마음으로 몽땅 읽어본다. 기억나는 내용은 별로 없지만. (엠마 스톤이 갇혔던 그)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안내원이 아까 대기열에서 읽었던 기념탑의 역사를 입으로 줄줄 읊는다. 토플 듣기보다 1.3배 정도 빠른 영어 솜씨에 감탄, 유리 밖으로 내다보이는 탑의 내부 구조에 또 감탄. 미국인이 영어 잘하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탑이 정교하게 지어진 것 역시 당연한 일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정상에 도착하면 괜히 김이 샌다. 명색이 전망대인데 창문이라곤 감방에 달린 창보다 조금 큰 두꺼운 유리판뿐이다. 전망으로 따지면 거짓말 조금 보태 우리 아파트 계단이 더 낫다. 위안을 해보자면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워싱턴에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이곳 외에 딱히 없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동서남북으로 뚫린 자그마한 창을 통해 보이는 국회의사당과 백악관, 링컨 기념관도 나름 웅장하고 볼만하다.


워싱턴 기념탑에서 바라본 내셔널몰 ⓒChris via flickr


   오랜 기다림이 무색할 정도로 전망대로서의 감동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에 곧잘 등장하는 워싱턴의 랜드마크에 직접 올라봤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래서 아직도 TV에 워싱턴 기념탑이 (주로 워싱턴 특파원의 뒷배경으로) 나오면 '나 저기 올라가 봤다'라며 두고두고 자랑하고 있다.


   T군과의 워싱턴 끝장 투어는 워싱턴 기념탑 외에도 여러 'TV 속 그곳', '스크린 속 그곳'으로 이어졌다. 담장 너머 멀리 백악관을 구경하며 '뉴스에 나오던 거랑 똑같네' 생각하기도 하고, 링컨 기념관까지 꽤나 먼 거리를 더위 속에 걸으며 '<포레스트 검프>에서 봤을 땐 이렇게 안 멀었는데'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반대로 여행에서 돌아온 뒤 지금까지도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워싱턴 곳곳을 보면 '그때 이런 곳도 가봤었지' 하는 감상에 빠지곤 한다. (옆에 누가 있으면 '나 저기 가봤다'도 빼먹지 않는다.)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볼 때 특히 더 그랬다. 새벽녘 링컨 기념관에서 밀담을 나누는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대낮에 관광객들 사이로 기념사진을 남기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특히 이 날은 작정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녔으니, 추억할 거리 자랑할 거리가 평소보다 배는 쌓였을 것이다.


(좌) 가기 전의 기대 / (우) 현실

ⓒDaniel Mennerich,Ted Eytan via flickr


   종일 온 도시를 누빈 피곤함에 찌들어 친구 T를 터미널까지 배웅했다. 숙소로 돌아가며 하루를 돌이켜 보니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많이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 나는 평소 혼자 여행을 하며 되도록 여유 있는 일정을 짠다. 그때그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고. 천성이 게으른 까닭도 있고 여행지에서까지 계획에 쫓기기는 싫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장 투어리스트 T의 하루를 따라가 보니 철저하게 계획된 여행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잘 짜인 계획은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자극을 얻게 해준다. 몸은 고되지만 그만큼 새로운 발견과 사유의 기회, 그리고 쌓이는 추억이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나 저기 가봤다'고 말할 기회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앞으로도 나는 엉성한 계획으로 게으른 여행을 할 것이다. 내 성격과 잘 맞기도 하고, 불확실성과 여백이 뜻밖의 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따금은 T와의 하루가 생각날 것 같다. 부지런히 움직여 꽉꽉 채운 하루는 한정된 시간과 예산에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니까. 때로는 끝장 투어도 도움이 된다.



Cover image: Mike Boening via flickr


이 승 곤 : Seunggon LEE

―가늘고 길게 여행과 사진,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배우는 사람"이라는 은사님 말씀이 아깝지 않도록 살고 싶습니다.

FACEBOOK : INSTAGRAM :

rupert112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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