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폭우 사이
지역마다 수국 명소가 생겨나더니 요즘은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하얀 라임 라이트 수국 맛집이 SNS에 자주 등장한다. 수국은 아름답지만 이걸 심어서 지역 명소를 만들어 내는 걸 보면 왠지 좀 얄밉다. 아래의 장점을 이용해 먹는 것만 같아서.
1. 성장속도가 빠르다.
2. 삽목으로 쉽게 번식시킬 수 있다.
3. 가지치기로 수형을 원하는대로 잡아주거나, 꽃을 많이 피우게 할 수 있다.
지역 공무원 조직에 이런 꿀팁을 공유하는 단톡방이라도 있는지 이곳저곳 수국 심기에 분주하다. 전국 각지가 비슷한 모양새가 되어가는 건 아쉽다.
이웃집 테라스에도 하얀 라임라이트가 한창이지만 우리 집 정원에는 없다. 내가 보기에도 청량하고 아름답지만 왠지 남들 다 하는 건 나라도 안 하고 싶은 야릇한 ‘미의 정체성’.
오늘 자 테라스로 말할 것 같으면 식물들에게 극기 훈련 장소라고나 할까? 남서향으로 나 있는 우리 집 테라스는 해가 길어지는 여름, 특히 지금 같은 삼복 더위의 낮 시간이라면 잠시도 나가 있기 힘들다. 어디를 가든 더운 계절이지만 직사광선이 내리 6시간 이상 쬐는 테라스는 일광 소독기 외에는 쓸모가 없다. 어닝을 펼쳐 식물들을 잠시나마 그늘 아래 쉬게 해주지만 벵갈 고무나무와 홍콩야자는 잎의 일부가 새까맣게 화상을 입었다. 그나마 화분에 심어진 관엽 식물들은 집 안으로, 어닝 아래로 긴급 대피라도 시키지만 옮길 수 없는 큰 화분에 심겨져 있는 옥수수는 잎이 말라 가고 있다.
테라스 정원은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온실 같은 아파트 베란다에 비하면 노지에 가깝다. 폭염은 식물들에게도 가혹하다. 지난 해 한여름을 테라스에서 보냈던 홍콩야자가 올 해는 유난히 힘들어 보인다. 한낮부터 저녁까지 서서히 잎이 아래로 처지기 시작하더니 해가 질 때 즈음에는 완전히 시든 식물 같아 보인다. 단지 나무가 오래되어 약해진 탓만은 아니다. 몇 해 사이 여름 폭염과 폭우가 지독해지는 게 테라스 식물들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사막에서 자라는 다육이나 선인장 정도는 되야 걱정없이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후변화가 언급되는 장면에서 주로 탄소 배출량과 더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약속‘따위를 곁다리로 얹고는 한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약속‘들을 행하는 동안 죄책감을 잠시 덜지만 기후 변화 속도가 나아지고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 뿐이라 한없이 무력감을 느끼다가도 이마저도 안 하면 어쩌냐며 다시 또 전기 플러그를 뽑고 에어컨 설정 온도를 높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고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야 마음이라도 덜 아프다.
어쩌면 지자체에서 다들 라임라이트만 심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이 이 폭염과 폭우가 잦아지는 극한 여름을 버텨낼 수 있어서 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