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자 이야기 8. 벵갈 고무나무

우연히 일어난 일들.

by 다락방지기

인테리어 SNS를 구경하다보면 깔끔한 북유럽 스타일 가구와 잘 정돈된 공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획 고개를 들어 보면, 애들 장난감과 책이 널부러진 우리 집 거실에 가벼운 한숨이 나온다.

- 애가 어리니까. 나중에 장난감 다 처분하면 잘 꾸며봐야지.

자신은 없지만 이 핑계로 내 탓을 피해본다. 다시 들여다 본 게시물에는 멋진 공간에 식물 화분이 한 두 개 있거나, 심지어 플렌테리어를 해시태그해 정글같은 집도 자주 보인다. 산세베리아, 스투키, 고무나무, 파키라, 행운목, 해피트리, 박쥐란 등등.



나도 신혼집을 꾸미면서 소파 옆에 화분 하나 가져다 놓으면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거실이 될 거라고 믿었다. 혼수 가전, 가구를 채우고 끝으로 용의 눈을 그리는 심정으로 벵갈 고무나무를 한 그루 샀다.



벵갈 고무나무의 커다란 잎은 노랑, 연두, 녹색이 섞이려는 순간을 멈춰 세운 것 같은 얼룩이 인상적이다. 잭슨 폴록의 추상같이 2차원의 평면 예술에, 붓질이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남겨 3차원의 시공간을 느끼게 한다. 잎사귀마다 무늬가 다르고 빛의 양에 따라 얼룩이 강해지기도 밋밋해지기도 하므로 액션페인팅만큼 ‘우연’의 결과물이다. 욕심껏 잎사귀 하나씩 No.1 , No.2 , No.3 라고 이름 붙여도 좋으련만.


우연이 만들어 낸 걸작은 미술관에만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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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No.14. N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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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친구들을 만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지금이야 모두 ‘학부모’가 되었지만 처음 만났을 땐 엄마들이 기숙사 방까지 짐을 챙겨줘야 하는, 고등학교 신입생에 불과했다. 반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지만 일과가 끝나고 기숙사 227호로 돌아오면 가족처럼 붙어있는 관계.


친구들과 같이 삼시세끼 급식을 먹고 입시 공부를 했다.

대학에 진학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싸이월드로 근황을 전해 듣거나 간혹 누군가 자취하는 곳에 놀러 갔다.

유학을 가거나 취업 준비를 하거나 일을 하느라 바빴다.

때때로 같이 기차 여행을 갔다.

직장 이야기만 하면 열변을 토하다 ‘그래도 너는 이런 게 좋잖아.’하고 서로를 부러워 했다.

친구네 가족이 상을 당하면 슬퍼하며 모였고, 친구가 결혼한다면 뭉클해하며 만났다.

결혼식 부케를 받아 준 친구의 딸이 쑥 커서 얼마 전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 입학했다.

알고 지낸 시간에 비례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제일 놀라운 건 지금도 만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올 초에 만났을 때 누군가 탈모와 흰머리 걱정을 하고 있었다.

- 요즘은 딸이 염색해줘.

- 딸이 다 컸네.

칭찬과 함께 우리도 나이가 들었다며 피식 웃었다. 이어지는 허리 건강, 실손 보험, 부모님 건강 걱정,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까지. 어른들이 보는 TV쇼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친구들과 이런 걸로 대화하게 될 줄이야! 역시 오래 살고, 아니 오래 사귀고 볼 일이다!



잠시 돌아보니, 우리는 잭슨폴록같이 액션 페인팅을 하는 중인 것 같다. 아주 장시간에 걸친 액션이라는 게 다를 뿐. 17살에 ‘우연히’ 친구가 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각자의 선택과 행보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이 감정과 기억으로 자취를 남긴다.




"시초는 우연이 만들어 놓되 그 시초를 이끌어 가는 것은 필연이 아닌가"

《유재용, 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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