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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공은 Jan 17. 2023

피구왕 서영과 우리들

소설집 『피구왕 서영』과 영화 <우리들>을 보고

황유미 작가님의 소설집 『피구왕 서영』을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주인공, 서영의 집은 이사를 한다. 분갈이를 해도 이윽고 자라나는 행운목처럼, 새로운 화분으로 터전을 옮기더라도 죽을 일은 없다는 건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서영이었다. 이방인이 새로운 무리에 합류하려면 긴장과 예민한 탐색이 필요했고, 탐색과 선택은 하루 안에 끝난다. 서영에게는 두 갈래의 선택지가 존재했다. 권력의 피라미드 꼭대기 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집단을 선택할 것이냐, 사람을 탐색하거나 힘겨루기를 하려는 피곤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친구를 선택할 것이냐. 서영은 후자를 선택하려던 것을 앞두고 혼란에 빠진다. 후자인 ‘윤정’이 이 교실에서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전학 첫 날 윤정과 밥을 먹는 서영에게 전자의 무리 중 하나가 접근한다. 그 애, 별로니까 놀지 말라고. 서영은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이전처럼 단조롭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피구왕 서영>의 시간적 배경은 1990년대 후반으로,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가 방영된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포켓몬 캐릭터의 스티커를 종류별로 모으는 놀이가 유행처럼 번진 시기다. 나 역시 이 시기를 거쳐 온 사람이라 서영의 학교생활에 단숨에 몰입할 수 있었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피구'를 자주했다. 일정한 구역 안에서 두 편으로 갈라서 한 개의 공으로 상대편을 맞히면 되는 놀이라 진입장벽이 낮았던 탓일까,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는 남자애들에 비해 여자애들은 늘 피구를 했다. 나는 내가 공을 잡고 상대편을 맞히는 건 잘 못했지만 피하는 건 곧잘 했는데, 그 때문에 종종 마지막까지 남았다. 주목받는 걸 싫어하던 내가 마지막까지 남는 건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맞으면 게임에 패하게 되는 상황마저 너무 싫었지만, 피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서영이도 피구를 피할 수 없다. 피구하는 코트 안으로 들어간 서영은 코트 뿐 아니라 학급 내 포식자 집단인 '현지' 무리에 들어가게 된다. 서영은 책을 좋아하는 이서영을 지우고, 피구를 잘하는 피구왕 서영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피구 연습을 하는 윤정과 시간을 보내게 되고 윤정과 가까워진다. 하지만 현지네 무리에서 벗어나 윤정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은데...



그런 서영이를 보고 있자니, 애정 하는 영화 <우리들>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우리들>의 첫 장면 역시 체육시간에 하는 피구로 시작한다.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각 편의 주장인 아이 둘이 가위바위보로 편이 될 아이를 지명한다. 카메라는 자신이 이름이 불리기를 바라며 상황을 지켜보는 선이를 비춘다. 선이는 민철이와 마지막으로 남는데, 마지막으로 가위바위보를 이긴 편의 주장이 민철이를 데려간다. 상대편의 주장이 이렇게 말한다.

"이선 못한단 말이야..."

민철이랑 바꾸면 안 되냐는 말도 덧붙이고는, 선이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며 농담인 거 알지? 하고 입발린 소리를 하며 카메라 밖으로 사라진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선이를 따라간다. 게임을 하던 중 상대팀 중 한 명이 선이에게 금을 밟았다며 아웃이라고 주장하고, 밟지 않았다는 선이의 말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선이를 떠맡게 된 주장 역시 게임의 진행을 위해 선이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낸다. 편을 고를 때 마지막으로 남은 것도 서러운데 금을 밟았다는 이야기에 퇴장까지 하게 되다니. 자신에게도 공이 올까 눈은 열심히 공을 쫓지만 마음은 공 너머에 있는 것 같은 선이다.

   

<피구왕 서영>에 현지가 있다면, <우리들>에는 보라가 있다. 권력의 피라미드 꼭대기 계층을 차지하고 있는 집단. 어느 날 보라가 선에게 제안을 해온다. 자신과 함께 노는 친구들이 방학식에 당번이라 늦게까지 남아 청소를 해야 하는데 선이 대신 해주면 생일파티에 초대해주겠다는 것. 모두가 떠나고 홀로 교실에 남아있던 방학식 날, 선이는 혼자 청소를 해도 보라의 생일파티에 갈 생각에 그저 즐겁다. 그리고 그날 전학생 지아를 만난다. 예쁜 팔찌를 만들어 보라의 집에 찾아갔건만, 주소는 보라의 집이 아니었다. 퇴짜를 맞은 걸 알게 된 선이 시무룩해 있는데 그 곁으로 전학생 지아가 지나간다. 길 잃은 지아에게 선이가 길 안내를 하며 둘은 함께 걷는다. 지아는 선이 보라의 생일 선물로 준비했던 팔찌를 눈여겨보고, 선이는 지아에게 선물한다. 팔찌를 나눠 끼며 둘은 친구가 된다.      

서로의 비밀을 나누며 순식간에 세상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된 선과 지아는 생애 가장 반짝이는 여름을 보내는데, 개학 후 학교에서 만난 지아는 어쩐 일인지 선에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선을 따돌리는 보라의 편에 서서 외면하는 지아와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선.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해보려 노력하던 선은 결국 지아의 비밀을 폭로해버리고 마는데...

   

<우리들>을 처음 보던 날이 생생히 떠오른다. 어느 해 내 일기장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보게 되다니! 그 시절의 고민을 이토록 세밀하게 다룬 영화를 만났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동시에,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얼떨떨했다. 선, 지아, 보라 셋 중 누구에 가깝냐고 물으면 나는 선이었기 때문이다. 선이처럼 학급 내에서 따돌림을 당해본 적은 없는데,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다가 따돌림을 당해본 그날이 생각났다. 술래 한 명이 다른 사람의 꼬리를 잡는 꼬리잡기를 하고 있었는데, 추운 겨울날이었고 아무도 내게 잡혀주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같이 놀던 아이들에게 한 번 따져보지도 못하고, 놀이를 중단한 채 돌아서서 집에 돌아갔다. 시장을 거쳐 가는 길이었는데, 시장 안에서 엉엉 울며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나는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날 이후 청바지는 종종 입어도 청자켓만큼은 멀리했다. '따돌림'은 내게 추운 겨울과 청색의 원단으로 기억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애정 하는 영화로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이들 좋아하는 선이 동생, 윤의 대사 덕분이었다. 선은 매번 친구 연우에게 당하는 윤에게 왜 자꾸 같이 노냐며 다그치는데, 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우가 때리고, 내가 또 때리고, 연우가 때리고, 내가 때리고, 그러면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윤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허무한 얼굴을 한 선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러게. 나도 그냥 놀고 싶은 거였는데. 어른인 내가 선이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내 속에서 해줄 말은 찾지 못했지만 내가 위로 받은 『피구왕 서영』 속 구절들을 손편지에 써주고 싶다.

     


서영은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내일은 어떤 무리에 들어갈지 무조건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전학과 동시에 백연초등학교 4학년 3반이라는 소속이 부여되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름뿐인 소속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과학실, 음악실, 운동장, 심지어 화장실까지 교내에서 이동이 필요한 순간마다 누구와 같이 갈지, 그리고 누구와 같이 집까지 걸을지 등 생활 전반을 결정짓는 진짜 소속은 아무도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롯이 아이들끼리 알아서 만들어가는 진짜 소속은 이름뿐인 소속보다 훨씬 중요하다.

(황유미, 피구왕 서영 p.50)


오롯이 아이들끼리 알아서 만들어가는 진짜 소속. 졸업 전까지 내내 중요한 그 소속. 그에 비하면 이름뿐인 소속은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읽은 많은 이야기책의 결말은 착한 사람이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이 벌을 받았지만, 교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른들도 학교에 다녔으면서 왜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주지 않는 것일까. 집에서는 착하면 상을 받고 나쁘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하고 모호한 말로 인성교육을 끝내버리고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지만, 막상 교실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집에서 배운 것은 다 잊고 다시 배워야 한다.

(황유미, 피구왕 서영 p.86)


이 구절 역시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건 교과 과정뿐만 아니라 집에서 배우지 못했던 다른 풍경을 배우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너와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가 쓴 글인데, 나 역시도 같은 고민을 했거든.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읽었지만 지금의 네게 필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편지에 담아보았어. 지아와의 일은 잘못일지 몰라도, 따돌림을 당한 건 선이 네 잘못이 아니야. 어느 누구도 따돌림을 당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선아, 네가 만든 팔찌 정말 멋있더라. 다음에 만나면 팔찌 만드는 법 알려줘.

      

이상으로 선에게 쓰고 싶은 짤막한 편지였다. 서영은 어떤 선택을 했고, 선이는 지아의 어떤 비밀을 폭로한 것인지는 각각 책과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길.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 두 작품을 멋대로 엮어보았는데, 함께 보면 재미가 두 배가 될 거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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