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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3):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부모는 자녀에게 빚지고 있다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감독: 스탠리 크래머, 1967)에서, 부잣집 딸 조안나는 존 프렌티스라는 의사와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는 당시로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매우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조안나는 23세의 상류층 백인 여성이고, 자수성가한 존은 한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37세의 흑인이다. 

이것만 봐도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종, 계층, 나이라는 장애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조안나의 아버지 매트 드레이튼은 유력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이다. 

특히 흑인의 인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들의 행동을 비판한다. 

어머니 크리스티나는 미술품을 전시하고 중개하는 큐레이터. 

차분한 지성과 사교성으로 그 분야에서는 인정받고 있는 전문가다. 

말하자면 조안나의 가족은 사회의 지도층, 즉 미국에서 일종의 귀족 계층이랄 수 있는 「와스프」(WASP. White·Anglo 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 색슨, 신교도)의 전형이다.

이에 비해 존의 부모는 평범한 흑인 가정의 보통 사람들이다. 

우편배달부 일을 하다가 은퇴해서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정도다. 

아들이 신망받는 사회인으로 성공한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만 백인 여자와 결혼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딸이 흑인남자와 함께 집으로 찾아와 결혼하겠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조안나의 부모는 일순 혼란에 빠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이고, 충분히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다. 

저녁식사를 하고 차를 한 잔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 안에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조안나와 존은 자신들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 부모들이 선뜻 동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안나는 부모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백인과 흑인 간 결혼이 16개 주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조안나 아버지의 평소 직업적 주장과 현실의 괴리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존의 아버지의 단호한 반대였다. 

존의 아버지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30년 동안 우편 가방을 메고 얼마나 걸었는지 알아? 75,000마일을 걸었어. 어둠 속에서 잔디도 깎았어. 네 공부할 책을 사주려고, 네 엄마가 널 위해 희생을 했는데 넌 뭘 해줬냐?... 근데 넌 네 엄마의 가슴마저 아프게 할 작정이냐?”


그러나 정작 존의 어머니는 조안나의 아버지에게 남자들의 무심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무슨 변화가 일어나나요? 왜 모든 걸 다 잊어버리죠? 난 저 두 젊은이들은 서로가 필요하다고 믿어요. 마치 공기가 필요하듯이... 저 두 사람을 보기만 해도 다들 알아차릴 거예요. 하지만 당신과 내 남편은 마치 장님과 같아요. 당신들의 눈에는 그들의 문제만 보이잖아요.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 아시나요? 그들 마음이 어떤지 알아요? 저는 남자가 나이가 들면, 그리고 성적인 욕구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면 모두 잊어버린다고 믿어요. 진실된 정열까지 말이에요. 만일 내 아들이 당신 딸에게 느끼는 감정을 가졌다면 당신은 다 잊어버린 거예요. 내 남편처럼 말이에요.”


이런 입장을 안 존의 아버지는 


“네 엄마가 뭐라고 하건 이건 너와 나의 문제다”


이제 존이 아버지에게 반박할 기회가 왔다. 


“이제 할 말은 다 하셨어요.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날 이렇게 키우셨으니 내가 부모께 빚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한마디 하죠. 전 빚진 게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가 백만 마일을 걸었다 해도 그건 해야 할 일이었다고요. 절 세상에 낳았기 때문이죠. 그날부터 저에게 진 빚을 갚은 것에 불과하다고요. 자식에게 저도 빚쟁이예요. 아버지 법대로 살라고 하지 마세요. 아버진 제가 누군지 몰라요. 기분이나 생각이 어떤지도! 이걸 설명해도 평생이 걸려도 못하는 일이에요. 아버진 저보다 30년이나 더 살아오셨어요. 아버지 세대에 믿어 왔던 건 그 당시에 맞는 얘기였어요. 아버지 세대가 죽을 때까지 그 무게는 우리가 진다고요. (존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얼굴이 우리락 불그락하며 주먹을 쥐락펴락한다) 그 짐을 내려놓으란 말이에요.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아버지, 아버지. 당신은 내 아버지예요. 저는 아들이고요. 사랑해요. 과거에도 앞으로도 사랑해요. 아버진 자신이 흑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날 그냥 남자로 생각해요. 저는 혼자서 결정해야 하고요. 그리고 빨리 결정해야 해요. 그러니까, 나가셔서 엄마랑 함께 계셔주실래요? 


아버지는 더 이상 할 말을 멈추고 아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묵묵히 자리를 뜬다. 이제 조안나 아버지의 결정이 남았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한동안 침묵하던 아버지의 독백이 독특하다. 


”내가 왜 이렇게 개자식이 되어 버렸지? “

              (깊이 사고한 결과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말과 함께 스스로 평소 직업적 주장과 삶의 주장을 일치시키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나의 내 아내에 대한 감정은, 조가 내 딸에게 가진 감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남편의 말을 듣는 아내의 눈과 조의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두 젊은이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생각하면서 사랑의 동질성을 확인한 것이다.


”너희 둘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선남선녀지.... 어떤 사람이 (피부색이 다르다고) 너희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너희가 백인과 흑인의 문제로 때문에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는 것이다. “ 


그들은 모두 아름다운 저녁 식탁 교제를 즐겼다.            


부모는 자녀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나의 정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해 질풍노도의 반항기를 거쳐야 했다. 

그때 이 영화는 나의 청소년기 방황에 있어 한 축을 잡아줬다. 

그 이후에도 내가 어떤 편견을 벗어나고자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나는 이 영화를 생각했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편견을 깨뜨려준다. 

지금 이 지면에서 깨고자 하는 편견은 첫째, 세대 차이에 대한 이해, 둘째, 자녀의 부모 넘어서기이다. 

그럼 첫째 문제는 다뤄보자. 아무리 봐도 존 아버지의 속마음은 아들의 이 결혼을 말릴 생각이 없다. 만일 끝까지 말릴 생각이었다면 조의 아버지가 결혼에 찬성을 할 때에도 반대를 했어야 했다. 

단지 아버지는 현실 파악의 명수였다. 

존의 아버지는 조의 아버지가 찬성하면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아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방어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은 아버지의 도덕, 아버지의 가치를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30년 동안 우편 가방을 메고 얼마나 걸었는지 알아? 

75,000마일을 걸었어. 어둠 속에서 잔디도 깎았어. 네 공부할 책을 사주려고, 네 엄마가 널 위해 희생을 했는데 넌 뭘 해줬냐?... 

근데 넌 네 엄마의 가슴마저 아프게 할 작정이냐?”


이에 대한 아들은 반박은 이렇다.


“이제 할 말은 다 하셨어요.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날 이렇게 키우셨으니 내가 부모께 빚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한마디 하죠. 전 빚진 게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가 백만 마일을 걸었다 해도 그건 해야 할 일이었다고요. 절 세상에 낳았기 때문이죠. 그날부터 저에게 진 빚을 갚은 것에 불과하다고요. 자식에게 저도 빚쟁이예요. 아버지 법대로 살라고 하지 마세요. 아버진 제가 누군지 몰라요. 기분이나 생각이 어떤지도! 이걸 설명해도 평생이 걸려도 못하는 일이에요. 아버진 저보다 30년이나 더 살아오셨어요. 아버지 세대에 믿어 왔던 건 그 당시에 맞는 얘기였어요. 아버지 세대가 죽을 때까지 그 무게는 우리가 진다고요. (존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주장을 강변하기 위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하며 주먹을 쥐락펴락한다) 그 짐을 내려놓으란 말이에요.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아버지, 아버지. 당신은 내 아버지예요. 저는 아들이고요. 사랑해요. 과거에도 앞으로도 사랑해요. 아버진 자신이 흑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날 그냥 남자로 생각해요. 저는 혼자서 결정해야 하고요. 그리고 빨리 결정해야 해요. 그러니까, 나가셔서 엄마랑 함께 계셔주실래요? 


내가 고등학생의 나이에 ‘부모는 자녀를 낳는 순간, 자녀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속이 뻥~ 뚫리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내가 세 자녀를 낳고 보니, 그 말은 매우 부담스러운 말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부터 부모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녀는 부모를 빚쟁이라고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이라면, 자녀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빚을 갚아가는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마음에 새긴 어떤 50대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의식조차 가누기 힘든 상황을 맞았다.

 7명의 형제를 어머니 곁에서 몰아내고 두 시간 동안 의식조차 없는 어머니에게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서운했던 것, 억울했던 것, 화나게 했던 것, 미웠던 것을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이렇게 맺었다. 


”다 용서해 드릴게요. 하지만 이제 엄마의 짐을 내게 남겨두지 말고 엄마가 가지고 가세요. 내가 더 이상 엄마를 원망하며 살지 않도록 해 주세요. “ 


이렇게 말을 맺는 순간, 의식을 헤매던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으로 화답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그 여성은 다른 형제들의 비난을 받았다. 


"어머니를 편하게 가시게 내버려 두지 않고, 꼭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떠나시게 만들어야 되겠니?" 


그러나 나는 그 여성에게 ‘잘했다’ 칭찬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내 자식이 나로 인해 힘든 짐을 지지 않도록 내 짐을 내가 지고 갈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 영화는 1960년대라는 사회 변혁기에 인종차별 극복이라는 주제를 통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국에서 그 당시의 인종차별의 수준은 이랬다. 

흑인이 버스를 타서 좌석에 앉아 있다가도 백인이 앞에 서 있으면 그것은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조의 아버지는 이들이 원하는 결혼에 대해 ”세상이 이들을 용납하지 않을 거야 “라는 발언에 대해, 그의 가톨릭 신부 친구는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야 “라고 말한다.

급변하는 시대에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부모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자녀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는 수동적 태도로 살아가지만, 부모의 짐을 벗어버린 자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뿐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살아가는 주체가 될 것이다. 

  

자녀에게 진 부모의 빚은 무엇인가?


부모라고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다. 

각자 자신의 문제를 다 안고 살아가며, 그 문제는 혼자 해결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친구가 필요하고 연애할 대상이 필요하며, 배우자가 필요하다. 

사람은 세상 살아가면서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투사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자기 한계와 결핍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부모도 자녀에게 완벽한 양육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누구나 각자 자기 문제를 다 안고 살아간다. 부부가 결혼하면, 자신의 문제를 배우자에게 투사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각자의 문제들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도 하면서 인격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갈등 속에서 사는 것을 즐기는 부부도 있으며, 갈등을 견디지 못해 이혼하는 부부도 있다.

자녀가 6세 정도 되면, 부모의 각자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각자 부모에게 가져온 문제 등을 다 물려받았다고 보면 된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하고 물려주는 이런 문제들이 곧 빚의 내용물이 된다. 

부모는 각자 자신의 문제, 성격, 삶의 주제와 의미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아 성찰을 해야 한다. 

그 성찰은 자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빚, 곧 가문의 내력, 정신적 병리, 집안의 집단 무의식, 자신만의 콤플렉스 등을 당대에 끊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6살이 되면 부모의 문제를 떠안고 자신의 문제로 알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부모가 자신의 당대에 해결하였으면 끝을 낼 수 있는 문제를 자녀는 출처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문제인 줄로만 알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이런 인식을 가진 부모도 자녀에게 자신의 문제, 집안의 문제를 자녀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를 인지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는 더욱 복잡한 문제를 자신도 모르는 중에 끌어안고 살게 된다. 

자녀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청소년기에 스스로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공격성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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