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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4):효심은 있으나 효행이 없는 세대

자연스러움에서 자유함으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들은 이야기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어떤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멋진 옷을 샀더니 그 옷 사는 데 한 푼도 보태 준 적도 없는 아버지가 "겉멋만 들었다"라며 핀잔을 주시더란다.

돈을 많이 모아서 외제차를 샀더니, 이번에도 역시 차 사는 데 한 푼 보태준 적도 없는 아버지가  "젊은 놈이 사치부터 배운다"라고 말하시더란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나와 내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면서 부모님께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청년은 법륜스님에게서 '제가 이렇게 해도 되는지'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 법륜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이가 20세가 넘으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맞다. 뭐를 해도 부모 눈치 안 봐도 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앞으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은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맞는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법륜스님의 그다음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대가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말씀을 안 들으려면, 내가 멋진 옷을 사기 전에 아버지 양복 한 벌 맞춰 드리고, 내가 외제차 사기 전에 아버지께 아반떼 한대 사다 드렸다면 부모님이 그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는가?"


이 이야기를 들고 수긍이 갔는지, 청년은 마이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제가 부모님께 전화드리겠습니다."

 


자연스러움에서 자유로움으로 


나의 앞 글에서 '부모에게 있어 자녀는 채무자가 아니라 채권자다'라는 주제로 세 개의 글을 썼다. 

그랬더니 사람들 중에는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자녀가 부모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이 당연하구나.'


'부모는 자녀에게 평생 빚을 갚아야 하는 존재로구나'


이런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유를 부모가 하는 것이지 자녀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녀는 그런 존재의 빚을 갚아주는 부모님께 대해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몸과 마음을 다해 양육해 주신 것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한다.   


지금의 부모 세대에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해 효심은 부족해도 효행은 있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부모의 남다른 사랑을 많이 받은 세대라 효심이 있다

그러나 그 효심에 걸맞은  효행이 없다.  


법륜스님의 말씀을 칸트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자연스러움은 자유로움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청년의 경우처럼, 나이가 20세가 되면 부모를 떠나게 되고 자기 일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며 부모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연로한 부모님에게 자신이 양육한 자녀가 명절이 되어도 찾아뵙지 않고 늙은 부모를 내 몰라라 팽개치며 자기네 살기 바쁜 경우라면, 부모가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하지 못하면, 부모가 연로할 때 자녀의 돌봄을 받기가 힘들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받지 못하는 것은 자녀가 자랄 때 사랑하지 못하고 방치하며 키웠던 탓일 수 있다. 

자녀를 잘 양육하지 못한 부모는 자녀가 잘 되어도 그 자녀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행한 대로 되돌려 받는 것이니까


법륜스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부모를 내 몰라라 함으로써 과연 그대는 자유로우냐?'를 묻는 것이다. 

그 청년이 왜 이 질문을 했겠는가?

부모로부터 받는 것 없이 간섭만 받고 하니까 그 부모를 떠나 '나 몰라라' 사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는 있겠으나,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런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인간다움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극복한 자유로움에 달려 있다. 


상담사례: 부모를 경홀히 여기던 자녀의 변화


대학 4학년 졸업반인 J(여성)가 나의 상담실로 찾아왔다. 

상담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는 때 J는 대학원에 재학 중에 있었다. 

학교에서 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마지막 1년을 학교 주변에 원룸을 얻게 되면서 독립된 개인 공간과 연장된 시간의 확보를 통한 만족감이 매일매일 온몸을 감동시킨다. 

대학 입학후부터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던 J였지만, 내가 J에게 자존심을 굽혀 부모님으로부터 1년간의 ‘향토 장학금 지원’을 요청할 것을 당부했다. 

대학 입학 이후 일체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경제적 독립을 지향해 오던 J였다. 

그래서 대학 졸업 때까지 등록금과 용돈은 스스로 해결하고도 늘 통장에는 넉넉한 잔고가 남아 있었다. 


나는 J에게 


"부모님께도 나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드려라"라고 충고했다.

다행히도 나의 충고가 받아들여 J는 학교 근처에서 원룸을 얻어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독립적이 되어 가는 딸에 대한 서운함으로 충만해 있던 차에 딸이 내미는 손은 마치 딸이 부모 자신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듯한 묘한 역전 현상으로 느껴졌다.

부모님은 J의 요청에 따라 기꺼이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된 J는 ‘어버이날’이 되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한 집에서 함께 살 때는 어버이날이 되어도 약간의 격식만 갖추면서 두 분께 꽃 한 송이씩만 달아 드리면 되는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 때문에 모처럼 열과 성을 다하여 부모님께 문자를 드렸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문자에 아버지의 답변은 “그래, 사랑한다”이었다.

순간 J는 울컥하고 말았다. 

원치 않게도 J는 아버지의 인사에 대해 자신이 감동을 해 버린 것이다. 

너무 낯설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J와 아빠 사이에 오고 간 문답


‘어어, 내가 이렇게 감동하면 안 되는데...’ 싶었지만, 마음의 감동은 어느새 검지손가락을 통해 문자로 옮겨지고 있었다. 

“아빠, 사랑해요” ‘보내기’ 누른 후, J는 자신의 이런 낯선 행동에 멍~ 해지고 말았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의 괴리를 절감하고 있었다. 


J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5~6살 때부터 어린 J가 보기에 아버지나 어머니나 모두 마음에 차지 않았다. 


부모가 저렇게 나보다 더 아기 같아서 내가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래서 J는 기본적으로 부모님께 화가 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자란 것을 보면, 아마도 J는 어릴 때부터 매우 조숙했던 것 같았다. 


J가 처음 상담에 임할 때, 내가 했던 말은,


'지금은 부모님이 미성숙해서 어려 보여 존중할 수 없다고 하지만, 상담이 끝날 때쯤에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였다.


J는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이 두쪽이 나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사실상 J는 부모님을 경멸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경고했다.


"아무리 일자무식의 부모님이고 자식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를 낳아 주고 키워 준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고마운 분이며, 품위를 가지고 존경받을 만하다."


관계를 중시하며 상담해 온 필자로서는 J에게 오래전부터 주문해 온 것이, 


‘자신의 인격 발달을 위해 부모님과의 관계 회복은 대단히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일평생 경멸해 온 부모님이 그 어버이날의 아버지의 문자로 인해 감사와 존중의 감정으로 이어져 오랜동안 억압해 오던 감정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 몇 년 동안 부모님에 대해서는 늘 일관된 태도를 견지해 왔다. 


어버이날 눈물이 앞을 가로막던 일이 발생하기 전에는 J는 ‘이렇게 미성숙한 부모님과 어떻게 관계를 회복해요?’ 하는 의아함으로 일관했다.

 

필자는 J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모가 존경스러운 것은 똑똑해서도 아니고,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도 아니다. 그냥 나의 부모님이기 때문에 존경스러운 것이다. 나의 풍성함이 바로 부모님의 부족함에서 왔고, 나의 부요함은 부모님의 가난해 짐을 통해 온 것이다. 졸업식장에서 박사가운과 박사모를 쓰고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후, 자녀의 교육을 위해 논밭을 손으로 일구어 온 일자무식의 어머니에게 가운과 모자를 씌워 주면서 사진을 찍어 드리는 것은 지금의 영광이 어머니의 무지한 존재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다’ 


J의 귀에 전해 진 나의 이 말은 A의 뇌 안에 빠른 속도로 입력되는 것이 확인될 뿐,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과 골수를 쪼개지는 못했다


그러한 J가 바로 그날, 어버이날에 짧게 주고받은 문자가 가슴을 치고 마음을 쪼개는 순간, 뇌 속에 입력되어 있던 상담자의 말들이 가슴으로 내려가 골수를 쪼개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J에게 눈물이 팽 도는 감격은 너무 낯설어서 용납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 감동을 고스란히 상담실까지 가져왔다. 

그 괴리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상담자로부터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30년 가까이 유지해 오던 철옹성 같은 '의식'이라는 요새의 망루가 한순간에 번쩍이며 지나간 한 줄기의 번개빛에 맞아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아마도 J의 이야기가 여기서 그쳤으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란 이런 일이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J는 그날따라 다른 이야기도 했다. 

평소 학교 수업을 충실하게 듣고 배우는 기쁨으로 차 있어 결석이나 지각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J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친구들의 수업에 대한 태만스런 태도에 늘 분개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수업을 빼먹으려 하고, 휴강이라는 희소식을 인생의 낙으로 아는 친구들은 J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존재들이었다. 


본질과 관계


필자는 상담자로서 J의 성실성과 교육의 가치와 인생을 굴러가게 하는 핵심 동력을 깨뜨리기로 작정해야 했다. 

말하자면 필자는 휘발유로만 가던 자동차가 우리가 마시는 공기로도, 또는 마시는 물을 가지고도 멀리 갈 수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했다

필자는 J에게 물었다. “붉은색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J는 “정열, 투우장의 열기, 골고다의 십자가에서의 죄용서, 마르크시즘, 미치는 것” 등등의 답변을 내놓았다. 

필자는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졌다. “붉은색이 초록색주황색이 함께 있을 때, 붉은색의 의미는 무엇인가?” 

J는 즉각 신호등을 떠올리면서 “멈춤”이라고 답했다. 

J는 동일한 사물을 놓고 본질적 의미를 찾느냐, 또는 관계 또는 차이에서 오는 의미를 찾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본질'과 '관계'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람이 본질만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뭔가를 자꾸 따지게 된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내편 네 편을 가르게 되고, 서로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나 따지는 것을 멈추는 순간, 한 이불 안에서 적과의 동침을 가능케 되면서 영원한 적과도 함께 살아가게 만들 수 있다


J는 어릴 때부터 본질에 충실했고, 본질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 J는 수업에 충실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늘 화가 나 있었다. 

어릴 때부터 J는 부모님에 대해서도 늘 그런 시각으로 봐 왔다

J는 그런 본질 중시의 시각어머니로부터 왔음을 어느 순간 자각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TV를 보면서, 저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다고 늘상 표현해 왔다.

J는 일평생 들어 온 이야기가 바로 그런 내용들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악역을 하는 사람을 욕하고, ‘사람은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비난을 퍼부었단다. 

가끔 악역을 하는 배우가 이웃 사람들에게 다짜고짜로 ‘겉으로 착하게 보이면서, 당신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라고 삿대질을 당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 사람들은 바로 ‘본질’을 따지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하게 된다.

J가 이렇게 본질을 따지게 된 데에는 꼭 어머니 탓만은 아닐 것이며, 아버지의 영향도 클 수 있다. 

J가 늘 아버지를 무시해 오게 된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함’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답지 못함’을 오랫동안 경험해 온 사람은 권위자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관계보다는 본질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박사학위 나온 자녀가 일자무식의 어머니를 본질로 보면,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관계를 중시한다면, 어머니가 아무리 일자무식 군이어도, 졸업식날에 박사학위 가운을 입혀드려도 어머니로서의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에 턱도 없이 못 미친다. 

일자무식의 어머니에게 아들 박사학위의 영광을 진정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 자녀는 본질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본질보다 관계를 더 중시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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