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급변하는 시대, 효도의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

과거로 회귀하는 청년세대

자기(self)의 두 가지 요소


내가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내 안에는 두 가지 인격이 있다. 

하나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자아(ego)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인격의 중심에 있는 자기(self)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대개 자아이다.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는 self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자신의 정서적 상태는 곧 self의 상태를 말한다.

자아가 내 인격을 이끄는 주체라면, 자기는 나라는 존재의 주인이다.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자기를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그것은 동일성과 자기성이다.

자기의 동일성은 시간의 변화와 관계없다.

유아기의 나, 아동기의 나, 청년기의 나, 장년기의 나, 노년기의 나는 동일한 나이다.

정신분열증은 동일성이 흔들리는 사람이다.


자기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요소이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나는 성장하고 변모하며 달라지게 되어 있다.

자폐증이나 히키코모리는 동일성만 유지하면서 시간의 흐름에도 변화하지 않으려는 고집을 가지고 있다.

자기성을 좌우하는 측면 중에는 외부 세계의 변화가 있다.

시대정신이 변화함에 따라 나의 자기성도 변화 속도에 적응하며 자신을 변화시킨다.


자기성을 동일성으로 사는 사람들


사람이 고지식해지고, 소위 꼰대가 되면 자기성을 동일성과 겹친 상태로 살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면, 할아버지의 자기성과 아버지의 자기성, 아들의 자기성, 손자의 자기성 등이 거의 동일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살아왔던 인생 여정을 아버지가 겪어 왔을 것이고,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강요하며 살아갈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본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나이가 든 어른일수록 지혜롭다고 여겨지며 사람들의 존경받는다.

그래서 공자, 맹자, 노자와 같이 옛 성현일수록 존경받는다.

그들이 남긴 말은 조선사회에서는 바이블과도 같다.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옛 성현의 말씀에 비추어 교훈을 얻으며 삶의 지표로 삼는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옛 성현의 교훈을 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열어간다.

그래서 조선시대 양반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옛 성현의 말씀을 학문으로 삼아 암송하고 삶으로 익히며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 목표는 대를 거듭하면서도 유지되어 왔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아버지의 훈계 아래 옛 어른들이 남긴 말씀을 학문으로 삼아 인격을 갈고닦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등 각자의 삶이지만, 동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자기성으로 산다 할지라도 결국 세대 간 동일성을 확보하며 살아야 그 사회에서 각자가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 살게 된 셈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라면 이렇게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늘날 세대차이 양상


진짜 그런지를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입구를 찾아들어가보니 첫 관문에 "요즘 젊은것들 정말 버릇없다"라고 씌어 있다는 이야기.


이 말은 어느 시대에나 세대차는 보편적으로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세대 간 너무 다른 격차를 느낀다.

지금 60대인 나와 내 또래 사람들은 지구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살았음직하다.

왜냐하면, 다른 시대였다면 400~ 500년 어쩌면 1000년 동안에 일어났을 변화를 내 인생 단 몇십 년 동안 다 겪고 봐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세대와 자녀 세대는 다른 시대에 비춰보면 200~ 300년의 세대차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부모와 자녀는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부모가 보기에 자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다.

똑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개념이 다르다. 


유튜브에서 본 어떤 아들은 밥상에서 모자를 쓰고 밥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꼴을 못 보고는


   "모자 벗고 밥 먹으라."


하자, 아들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모자하나 쓴 것 같지고 지금 몇 년째 서로 대화가 끊어져 회복할 길을 찾지 못한 채 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한다.


자녀는 이미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자녀는 존중의 대상이다.

자녀의 언행을 일일이 이해하려니까 서로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자녀가 부모와 다름에 대해 인정해 주고 그 자체를 존중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입장에서 자녀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뭔가를 가르치려다가 꼰대 소리를 듣는다. 

꼰대란, 과거 오래전에 입력한 것을 가지고 현재 세대 앞에서 출력하려는 사람이다. 


과거 오래전이라면, 바로 유교적 사고로서, 수백 년 전에 입력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교적 사고를 가지고 첨단 시대를 사는 자녀에게 출력하려고 하니 자녀로서는 거부할 수밖에 없다. 


효자 효녀가 더 문제가 되는 시대


최근 상담실을 찾아오는 사람 중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청년들이 있다.

30대의 청년은 IT 업계 회사에서 팀장을 맡고 있다가 후배에 밀려 직위를 지키지 못하고 강등되어 심지어 사원급까지 내려왔단다.

그녀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과 경영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마침내 한없이 뒤처져 버렸다.

결국 퇴사까지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한 유효성을 의심하고 있다.


20대 후반의 청년은 초등학교 교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던 중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을 좋아해서 교육대학을 갔고, 사명감을 가지고 초등학교에 발령받아 처음 2년 동안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기쁨으로 젊음을 불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 출근하는 것이 너무 싫어지고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졌다.

그녀는 교회에서 유년부 교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비슷한 시기부터 주일학교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이 두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부모에 대한 효심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의 삶에서 생생함을 잃어버리는 대신, 연로하신 부모님을 챙겨드리는 것에 생생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60대인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 아프고, 병이라도 나서 병원에 입원하시면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앞장섰다. 

부모님이 언젠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이런 일들이 누가 봐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효심일 뿐이다.

문제는 이 효심이 자녀를 끌어들이는 힘이 너무 강력해서 자녀들의 현실이 힘겨워졌다는 점이다. 


이인증이 현실화되고 있다 

 

사람이 현실감각을 놓쳐 버리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집착하게 된다.

위의 두 사람은 부모님께 효도를 다 하는 것이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해져 버렸다.

부모님은 현실에서의 생생함을 가지고 있다가 현실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생생함을 회복하고 있다.


부모님이 힘들어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고, 앞으로 연로해져 갈수록 연약해지며 죽음을 기다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닭똥 같은 눈물이 절로 떨어진다고 한다.

현실에서 생생함을 놓치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생생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퇴행이다.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내면서 '자기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지만, '동일성'이 흔들린 결과 과거의 어느 시점이 그녀들의 삶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결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현실에서 열심을 내 보고자 해도 안 되는 것은 몸과 정신의 분리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서, 그들은 모두 게임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임중독에 빠져 본 적이 있다면, 몸은 모니터 앞에 있지만 정신은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오는 병이 바로 '이인증'이다.


이인증에 걸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에 속도를 맞추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 똑같이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잘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현실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 자체가 '자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동일성으로 돌아가는 현실에 머물고 싶은 것이다. 

상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이 상담하는 케이스 중에는 바로 이런 문제로 힘들어하는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 



효심의 형태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브런치에 올린 글 중 [잃어버린.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2)]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배경으로 현실을 제대로 살라


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시대의 효도도 달라져야 한다.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렇지만 위의 두 경우처럼, 부모님에 대한 효심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놓친다면 이 또한 불효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변화가 빠른 시대에 자신을 과거의 한 시점으로 묶어 놓음으로써 현실 감각을 놓쳐 버려서는 안 된다.

나는 현대인들이 부모님만 바라보는 효심으로 과거의 삶에 얽매어 현실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보다, 부모를 배경으로 삼아 자신의 현실을 살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어떤 남성은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연인에게서 이런 요구를 받았다.


    "선택해. 네 부모님이야 아니면 나야"


이 남성은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남성은 부모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남성은 결혼을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해 있다.


나는 그 남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은 아무리 끊어내도 그것은 천륜이기 때문에 부모는 부모다. 그렇지만 부모님 때문에 여자친구를 이렇게 매번 끊어낸다면 결국 영원히 모태 솔로로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

오늘날 효심은 과거와 같아서는 안 된다.

효심도 시대에 맞게 분화되어야 한다. 


효심이 분화된 청년은.


부모만 바라보는 효심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놓치는 것보다, 부모를 배경으로 삼고 자신만의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


더 이상 과거의 시간에 매여 현재의 시간을 놓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상담의 현장에서 이런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이 문제가 젊은 세대 전반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와 자녀(4):효심은 있으나 효행이 없는 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