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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2): 자녀는 채권자다

자녀가 태어나자 부모는 자녀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자녀는 그 집안의 주인공이다


어느 집안이든 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존재감은 1/n이 아니다.

아기는 그 집안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아기가 울면 온 식구가 달려와서 그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왜 우는지 상황파악에 힘쓰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아기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기는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나 보잘것 없이 작은 존재로 사는 것이 아니다.

가족 모두가 '아기 중심'으로 돌아가 줄 때, 아기는 자신이 가족의 중심이 되는 것뿐 아니라 차츰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을 배워가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기는 엄마를 자기 의도대로 부려보는 경험도 하게 된다.

엄마의 젖을 빨 때에도 엄마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마구 빨아대고 엄마 젖가슴을 텅 비게 만드는 통쾌한 사건을 벌이기도 한다.

아기가 원하는 대로 엄마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마구 울어댐으로써 비명을 질러본다.   

아기는 엄마를 만만하게 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휘두르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기가 요구하는 대로 휘둘려 줘야 마땅하다.

아기에게 있어 엄마는 만만한 존재여야 한다.

아기는 이런 식으로 엄마를 자기의 연장으로 마음껏 사용함으로써 향후 생존 뿐 아니라 평생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해 가는 데 필요한 <일차적 자기애>를 채우게 된다.


            자녀는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태어났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자녀는 부모의 계획이나 의도에 의해 태어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과거에는 대부부의 부모가 이렇게 생각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자녀를 집안의 채무자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프랑수와즈 돌토식으로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자녀는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남자가 한번 사정할 때 4억 마리의 정자가 배출되는데, 그중에 가장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고 가장 절실한 한 마리의 정자가 난자를 만나 수정된다.

부모 입장에서는 부모에 의해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지만, 자녀 입장에서 보면,


"내가 태어나기 위해 엄마와 아빠가 필요했다"


는 식이 될 것이다.

사람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강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로 나라는 생명이 선택된 것이다.

이렇게 부모가 자녀의 존재 욕망을 이해한다면, 최소한 자녀를 내 것으로 여겨 부모가 원하는 모양대로 살도록 강제로 이끌어가지는 않게 될 것이다.

자녀가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위해 부모의 성욕을 자극시키고 흥분하게 만들어 부모로서는 가장 강한 성욕을 발동시켜 강한 존재로 태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아기의 존재욕망을 존중하는 부모라면, 최소한 자녀를 자신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부모가 자녀를 자신이 소유물 정도로 여긴다면, 이는 부모가 자녀를 빚진 자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는 아기에게 낳는 순간 아기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기 때뿐만이 아니다.

자녀의 각 성장단계마다 부모가 마땅히 지불해야 할 채무를 충실하게 갚아나가야 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빚을 갚는 입장이라면, 자녀는 부모님께 나를 키워 준 은혜를 갚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부모는 최소한 자녀에게 존재의 채무를 넘겨줘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녀와 그 후대의 자여손을 통해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영원을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보다 나은 자녀를 양육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에게 채무를 유산으로 짐 지워서는 안 된다.

그 채무를 부모가 떠안음으로써 세대를 거듭해 가면서 그 존재는 계속 발달해 갈 것이다.


             과거사 청산과 독일 청년과 일본 청년의 차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정부가 패망하고 1949년에 독일 연방공화국은 나치가 일으킨 전쟁과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철저하게 사과를 했다.  

철저한 사과를 하면서 과거사를 청산했다고 하지만, 완전한 청산은 아니었다.

이 점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서독의 법무부 간부 중 77%가 나치당원 출신이라는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기회가 될 때마다 사과를 한다.


1960년대의 젊은이들은 독일 사회가 과거의 역사를 직면하고, 아울러 인식의 변화를 이뤄내게 하는 동력이었다. 반면 일본에선 이러한 대규모의 사회적 압박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청산의 기저에 ‘68 학생운동’(1968년 서독에서 일어난 나치 청산 학생운동)이 있다고 평가한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1737호)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재판에 넘겨졌던 독일의 A급 22명 중 19명이 유죄를 선고받아, 그중 12명이 교수형을 당했고 3명은 종신형, 나머지는 10~20년 형이 내려졌다.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에도 동서독 국내형법으로 전범처리 규정을 만들어 전쟁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종전한 지 80년 가까이 되어도 여전히 숨어있는 전범을 찾아 재판대에 세우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고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이라는 명칭이 붙은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자 28명이 기소되었다.

그중 이미 사망하였거나 심각한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3명을 제외한 나머지 25명은 모두 유죄를 받는다.

그들 중 7명은 사형에 처해졌지만, 전쟁범죄에 가장 선두의 자리에 섰던 일왕은 기소조차 면제되었고, 나머지 A급 전범자들은 3년 이내에 모두 석방된다.

석방된 자들 중에는 나중에 총리까지 되는 전범자도 있다.


독일과 일본의 이러한 차이는 그 후대 젊은 세대에서 전혀 다른 현상을 보인다.

만일 2차 대전과 관련된 영화를 볼 때, 독일청년과 일본청년은 누구 편을 들겠는가?

독일 청년들은 나치군대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 편을 든다.

그러나 일본청년들은 연합군 편이 아닌, 일본 편을 들면서 영화를 관전한다.


왜 이런 차이를 낳게 되는 것일까?


독일 정부와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채무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젊은 세대에게 채무를 물려준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세대를 거듭하여도 채무는 영원한 유산으로 넘겨주게 될 것이다.

우리로서는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아 괘씸하기도 하다.

그러나 독일처럼 철저한 반성을 한다는 것을 일본에게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라면,

우리는 일본 놈들이 어설픈 반성으로 구멍 난 역사를 땜질하게 만드는 것보다

세대를 거듭해 태어나는 후손들마다 역사의 채무자로 만들어 영원한 빚쟁이로 살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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