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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1): 자녀는 채무자인가?

비명을 지르라

프랑스의 아동정신분석가 프랑수아즈 돌토(Francoise Dolto)는 어느 집안이든 후손을 힘들게 하는 무의식적 채무라는 유산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주변을 봐도 어느 집안도 어느 가문도 문제없는 집안은 없다. 

무슨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뿐,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녀는 억울한 채무자다


이런 가계의 정서적 시스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아무런 채권 채무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 가계가 지고 있는 엄청난 빚을 지는 것으로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가문이나 집안이든 가문의 내력을 후대에 내려보내게 되어 있다.

그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가문의 채무를 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20년 전에 만난 어떤 여성(그분은 피아니스트로서 명문대 교수였다)은 결혼하여 첫 명절에 시댁으로 가서 모든 형제들과 그 가족들이 모이는 모임에 참석했다.

그녀는 많은 가족들이 모여서 정신없는 가운데 자신이 할 일을 열심히 찾아서 동분서주했다.

처음 가지는 모임이라 아무 생각이 없다가 모임이 끝나가는 시간이 되면서, 모인 남편 형제들과 시부모님을 찬찬히 살피게 되었다.

한참을 관찰하는 중, 그녀는 갑자기 입이 다물어지는 기겁할만한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집안의 남자들은 다 빈둥대고 있고, 여자들만 부지런히 일을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부터 모든 남자 형제들(4명)이 모두 특정한 직업 없이 실업자로서 노는 일에 바쁜 사람들이었고, 동서들이 각자의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자기 남편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돌한 줄 알면서도 시어머니에게 따져보기로 했다.

시어머니 왈,


"이건 집안 내력이다. 네 시아버지가 평생 놀고먹었고, 그 형제들이 그랬다. 할아버지도 그랬다. 그런 각오도 없이 결혼했니?"


그 시댁가족 모임은 그녀에게 마지막 모임이 되었다. 

남편과 집으로 돌아와 한바탕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그녀는 남편에게 비명을 질렀다.

남편은 그녀의 비명에 귀를 닫았다.

그래서 그녀의 요구에 따라 그들은 이혼했다. 

그 남편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그 집안의 채무를 안고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자기가 물려받은 채무를 아내에게 떠 넘기려 했던 것이다. 

여자 하나 잘 만나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는 대대에 걸쳐 물려 온 의식을 그녀의 남편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채무


가문의 채무는 무엇인가?

채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 특별한 권리라도 있으면 그 채무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유럽인들은 다른 지역보다 희귀병이 많다.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기 가문보다 낮은 급의 가문과 결혼하는 것을 싫어해서 근친결혼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유럽 고전 문학 안에는 사촌 간에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는, 우리로서는 좀 납득이 안 가는 그런 결혼이 성행해 왔다는 점이 아무렇지 않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 왕조>이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유럽 지역을 6세기에 걸쳐 통치한 최고 가문이다.

유럽을 6세기 동안 통치한 유럽 최대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는 많은 왕과 왕비를 배출하였지만 그 가문은

근친결혼으로  유전병인 '합스부르크 턱(Hapsburg jaw)'을 만들어냈다.  

‘합스부르크 턱(Hapsburg jaw)’은 주걱턱과 아래위 턱뼈가 툭 튀어나와 보인다.


또 다른 유럽 최대 가문으로 꼽히는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를 이끈 명문 가문이지만, 이들 역시 주걱턱, 구루병 같은 특별한 유전적 질환을 앓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심한 주걱턱이었던 카를로스 2세는 구루병에다 정신까지 박약했다.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누리는 만큼 감당해야 할 것도 많았던 것이다. 


                             


돌토는 "표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부모에게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아이나 혹은 그의 증손에게서 표현될 것이다."([프랑수아즈 돌토], 108쪽)라고 말했다. 

해결되지 않은 불행은 그 집안의 3대에 걸쳐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 이렇게 정신분석학에서도 통한다.

또 돌토는 "어머니의 역사, 아버지의 역사, 가정의 역사를 자신이 떠안을 수 있다는 것, 결국에는 다른 사람이 해결하지 못한 고통과 에너지를 자신이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의 특수성이다"(같은 책, 108)라고 말했다. 

부모가 물려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녀는 비명이라도 질러야 한다. 

자녀의 비명은 부모의 문제, 집안의 내력을 일방적으로 떠 안지 않겠다는 비명이다.

자녀는 부모가 물려준 문제를 거절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집집마다 문제가 없는 집은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자녀에게 어떤 문제가 드러날 경우, 부모는 초점을 자신들 안에 두지 않고, 다른 집안과 비교하고, 다른 집안의 자식들과 비교하는 등 발생되는 집안의 문제를 직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가문의 빚과 유산의 전달은 일차적으로는 부모-자녀 간의 오이디푸스 문제, 즉 삼각관계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차적으로는 가족들의 비명과 분노표현 또는 각종 비행사건으로 나타난다.

삼차적으로는 각종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다. 


                          먼 혈통일수록 질병은 상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법조문에 동성동본간 결혼 금지 조항이 있었다.

2005년 3월 31일 민법으로 제809조가 개정되어 남녀평등과 혼인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동성동본금혼제도를 폐지하고 근친혼금지제도로 전환하였다.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외부에서 온 남자 손님을 맞을 때, 그를 극진히 대접하여 자신의 아내와 자게 만드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윤리적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풍습은 나름 그들은 근친혼에서 오는 유전병을 막으려고 궁여지책으로만 만들어낸, 종족보존을 위한 지혜에 해당한다.

어느 혈통, 어느 가문이나 유전자 질병은 다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서로 먼 혈통끼리 결혼할수록 그러한 유전병은 서로 상쇄되고 촉발을  막아준다고 한다. 

에스키모 인들의 그런 모습은 자기 종족집단 안에서 물려받은 채무를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분투 노력하는 것이다.  


                              피의 문제로 채무를 지다


나의 내담자(현 60대)의 세 살 위 형은 어린 시절 <재생불능성 빈혈>로 세상을 떠났다.

요즘은 그 병이 불치병이 아니지만, 1970년대의 상황에서는 불치병이었다.

그의 형은 2년 동안 식물인간상태에 있으면서 계속된 수혈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내담자의 사촌동생은 35세 때 갑자기 간염으로 쓰러지더니 병원에 실려 가 24시간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급작스런 간염 발병은 당장 죽을 만큼 심각한 병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원 후  피가 말라가서 계속 수혈을 해 주는데도 피가 사라지고 안 보이더란다.

그래서 그는 수혈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몸이 뚱뚱 불어나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내담자의 또 다른 사촌 동생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 가문에서 일어난 모든 죽음의 공통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피의 문제라는 것

둘째는 젊은 나이에 사망에 이른 모두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거역한 적 없이 너무 착하게 살았다는 점이다.

그 집안은 피와 관련된 유전병이 있는 것이다.

그 착한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표현을 못한 채, 채무자가 되어 혈통적으로 물려받은 유전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꽃다운 나이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비명을 질러야 한다


어떤 부부는 어릴 때부터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남편의 집안은 늘 조용하고 평화로워 큰 소리 날 일도 없고 한 번도 싸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아내의 집안은 모였다 하면 시끌벅적하고 목소리도 크다.

명절이 되어 형제들이 왁자지껄하며 모이면 꼭 싸움으로 끝난다.

시댁과 처가를 오가면서 그들은 서로가 납득할 수 없는 분위기를 접하게 된 것이다.  

집안이 평화로운 것이 나쁘고 자주 싸우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평화를 위해 참고 사는 것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채무를 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가문으로 내려온 많은 빚을 지운다.

그런 아내들 중에는 스스로 자신이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빚을 감당해 내려고 애쓴다. 

알고 보면 그런 남편이 아내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남편 가문으로 내려오는 온갖 짐을 다 짊어지고 사느라, 정작 아내가 화병, 암, 고혈압, 중풍으로 신체화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처한 사람에게 돌토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명을 지르라"


이다.


부모가 윗대로부터 받은 채무를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게 하려면, 비명을 질러야 한다.

남편이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내력을 부당하게 강요하거나 희생을 요구하면, 아내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엄마는 자녀가 비명을 지를 때 아이의 요구가 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비명을 질러야 가문의 내력을 당대에서 끝장내기를 시도할 수 있다. 

내가 채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집안은 언제든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결혼은 곧 전쟁터로 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가족이 원수다"(마 11:35)라는 선언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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