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여성의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열병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의 여성관에 대한 나의 의견

이 글의 제목은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의 [여성, 그대의 사명은]의 제8장 제목(<지루함이라는 이름의 열병>)에서 빌려 왔다.


폴 투르니에는 20세기 초반의 유명한 스위스 정신의학자이며, 종교와 정신 건강에 대한 접근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여성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자이며, 여성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성의 정신 건강과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성의 심리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여성에 대한 심리적 지원이 그들의 가정생활, 사회생활 및 직업적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여성의 직업적 발전과 교육적 발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여성이 직업에서 성공하고, 지식을 습득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폴 투르니에의 여성관은 그가 생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인용되고 있다.


            서구 여성의 통상적인 삶


나는 나름대로 투르니에가 말하는 여성의 '지루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성은 남성보다 여러 면에서 능력이 많다.

재능과 기술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여성성을 가지고 일하면 무엇을 하든지 탁월해질 수 있다.

일하는 능력에서도 그렇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사람들과 관계하는 일 등은 남성과 비교할 수가 없이 유능하다.

폴 투르니에의 말대로, 남성은 모든 것을 인격적인 것을 사물화 시키는 데에 능하다고 한다면, 여성은 사물화 된 것조차 인격적으로 교류하고 관계적으로 만드는 데에 유능하다.

그런데 서구 여성의 <지루함>이란 무엇인가?

물론 이 <지루함>이란 한국 여성의 삶을 봐도 예외적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여성의 삶이 지루해지는 이유는, 남성(남편)이 여성(아내)의 본성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긴 세월의 공작 덕분이다.

남성도 연애할 때만큼은 시인이라 칭해도 될 만큼 감성적이고, 감정이 풍부하다.

그렇게 해서 여성을 아내의 자리에 앉혀 놓으면,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감정도 감수성도 인격적인 교류도 다 끊어낸다.

이 말은 남성을 비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폴 투르니에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서구 여성이나 한국 여성이나 모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중독이 되어 있어 온전한 여성의 삶을 살기 어려운 것 같다.

여성은 이리저리 밀려다니면서 여성적 본성으로 살지 못하고 그만큼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산다.


                한 인격이 된다는 것

폴 트루니에는 이렇게 말한다.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 대해 책임지고, 자신의 내적 소명감에 반응하며, 자유로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경로를 택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첫째, 자기에 대해 책임진다는 것은 인격성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자기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단순히 행동과 결과에 대한 책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때로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둘째, 자신의 내적 소명감에 반응한다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에서 느끼는 목적감이나 용기,

         삶의 의미 등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 소명감은 각 개인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내적 소명감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자신의 내적 소명감이 될 수 있다.

       개인이 내적 소명감에 대해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목표와 욕구를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자유로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경로를 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자유와 자기 결정이 개인의 인격성

       과 주체적인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를 위해 여성은 재능과 기술 개발을 통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집안에 매여

       이를 포기하게 된다.

                        

                     여성적 지루함


최근까지 여성의 삶은 위의 세 가지 전제를 삶 속에서 실현해 나가기에 역부족이었다.

여성이 위의 세 가지 전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여성적 지루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 여성이건 두 가지 욕망 가운데서 갈등하게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결혼해서 엄마가 되어 자기의 조그마한 세계를 만들고 자식을 사랑하고 양육하고 돌보는 것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그 세계 속에 동참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여성, 그대의 사명은] 폴 트루니에, IVP, 90)


사실은 여성들은 이 두 가지를 다 원한다.  

그렇지만 여성 자신이 규정하는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기대에 따라 한정되고, 억압되고, 제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성이 가정에서 가사노동과 아이 양육을 담당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여전히 기대되고, 그 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역할과 기대는 여성이 자신의 인생에서 펼쳐나갈 가능성을 제한하고, 여성이 스스로를 개발하고 성장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여성적 지루함은 거세당한 결과


연애를 할 때는 남자가 보기에 여자가 여성스러워 보이는 것에 홀딱 반하기도 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그것은 옛 전설이나 신화 또는 속담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한 기가 막힌 전략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종별로 다양하다.


대부분의 남편은 아내를 전적으로 거세한다.

남편은 아내의 무엇을 거세하는가?


먼저, 아내의 여성성을 거세한다.

아내가 여성으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남편은 철저하게 아내로 하여금 모성애를 발휘하게 만든다.

남편은 아내가 자녀들에게 모성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남편 자신에게도 모성 역할을 해 줄 것을 바란다.

아내가 모성성을 발휘하는 한, 남편은 '영원한 소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둘째, 사회적 능력을 거세한다.

 아내는 한 인간으로서,  '그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그 세계 속에 동참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지만, 능력을 발휘해 본 적이 없어 자신이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의 사회적 능력을 거세한 결과이다.


셋째, 감정을 거세한다. 

남편은 남자이기 때문에 아내가 감정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서는 견딜 수가 없다.

남자에게 있어 감정은 마치 우주와도 같다.

그래서 남자는 아내와 성관계를 할 때조차도 아내가 감정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자기 쾌락만 챙기고 빨리 끝내 버리는 쪽을 선호한다.

남편이 감정을 제대로 발휘하는 현장의 주인공으로서 아내를 만나게 되면 끔찍스러운 정도로 보고 싶지 않아 비명을 지른다.

남자들은 내면적으로 가진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강하다.

그 자존심은 사회적 페르소나로 다져진 자존심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폴 투르니에가 강조하는 인격적 요소 중 하나인 내적 소명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그래서 남자는 대부분 정서적으로 '영원한 소년'에서 자라지 못하고 만다.

아내는 이 '영원한 소년'을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럽게 다루는 법을 터득해 간다.

결국 여자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중독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여자는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열병에 빠지게 된다.


        '자발적 순종'에서 '자기 사명'으로

모든 문화가, 그리고 대부분의 책이 여성에게 남편에 대한 '자발적 순종'을 강요한다.

그렇지만 폴 트루니에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우리로 하여금 행복에 이르는 또 다른 길, 즉 대화의 길을 걷게 했다. 그 길은 구름 한 점 없는 길은 아니지만 서로가 성숙하는 길이다. (같은 책, 93)


라고 말한다.

대화도 좋지만, 내가 보기에 평화체제에서 안정감 있는 대화는 부부간 성숙을 지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락한 <악한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보면, 부부간 갈등이라는 구조 안에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만드는 과정에서 인격 성숙을 논할 수 있다.  

부부간에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갈등을 한껏 고조할 수 있도록 견고한 장, 결혼이라는 제도가 부부 앞에 있다.


무엇보다 자기에 대해 책임을 지고, 내적 소명감을 가지며, 인생 목표를 자유로이 설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부부간에 서로를 반영해 주는 관계가 아니면 안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남자가 외부세계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유명인사이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로 칭송받는다 해도 그것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없다.

아내는 가부장적 질서에 중독된 상태에서 '자발적 순종'을 통해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잘 키워낸다고 해도 지루함을 면할 수 없는 중에는 그녀 역시 '나는 누구인가?'를 알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

인격 성숙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그 '누구'를 발달시켜 나가는 것이다.

남편은 사회적인 페르소나를 내려놓고, 자기 아내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아내는 평생동안 사용해 온 모성성과 남성성을 내려놓고, 남편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마땅하다.

남편은 아내 앞에서 보잘것없는 '영원한 소년'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성숙의 단계로 접어든다.

아내 역시 남편을 통해 '여성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중년기, 특히 50세를 기준 나이로 삼고 마땅히 해야 할 작업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결코 <인격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누구' 발견을 통한 인격성숙이야 말로  내적 소명감을 찾아가는 <자기 사명>을 발견하는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