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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에게 젖 먹이기

모유수유  vs 젖병수유

    (사진: pixabay)

모유수유와 젖병수유의 차이


탐구자 : 모유 수유와 젖병 수유의 차이에 대해서는 위니캇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젖병 수유를 하면서 모유 수유하는 것처럼 같은 자세로 임한다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것인가요? 


분석가 : 좋은 질문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에 아기는 대단한 흥분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 아기는 몸 안에 있는 모든 리비도를 입술에 집중시켜서 젖을 빠는 데에 ‘몰두’를 하기 때문이죠. 위니캇은 바로 이 상태, 즉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의 흥분 상태에 있는 아기와 어머니의 유대가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더 강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아이가족그리고 외부세계}, 63) 이에 비해 젖병 수유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모방한 가짜에 불과한 것이죠. 


철학자 : 그것을 플라톤의 이데아 삼중구조로 말하자면, 어머니의 젖가슴은 모성애라는 이데아를 완벽에 가깝게 분여 받아 실재(the real)를 보유하고 있지만, 젖병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모방한, 일종의 시뮬라크르(가짜)가 되는 것이죠.  그나마 어머니의 품을 제공받는 가운데 젖병 수유를 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젖병 수유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분석가 : 모유수유가 두 사람 사이에 매우 인격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젖병은 어머니를 사물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인 것은 맞지만, 그나마 모성애라는 이데아를 어느 정도 분여 받아서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겠죠. 그러나 그것이 시뮬라크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아가 느껴야 하는 만족을 충분히 느낄 때, 유아는 본능적 긴장의 해소와 함께 만족감,  예상되는 흥분, 그리고 수유 중의 활동경험 등을 체득하게 되는 거죠. 


탐구자 : 아까는 분석가께서 아기는 이 시기에 ‘본능’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위니캇은 왜 여기서는 ‘본능적 긴장’을 언급하는 건가요?


분석가 : 예리하게 보셨어요. 여기서 ‘본능적’이라는 말은 욕구와 관련된 본능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면, 젖이 적절하게 공급되지 않을 경우, 몸이 자동적으로 긴장을 동반하면서 반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머니가 적절하게 수유를 해 주지 못하면, 본능에 결핍을 가져와서 충동을 낳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구강기적 환상 내지는 내장환상을 가져오게 되고요. 이해가 되나요?


탐구자 : 네,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 외 다른 양육자가 아기를 잘 키운다고 해도 어머니만이 해 줄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남아 있게 되겠죠?


분석가 : 물론입니다. 위니캇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통해 수유를 경험한 유아는 동일한 횟수만큼의 젖병 수유를 경험한 유아와는 정서적 상황은 명백히 다르다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탐구자 : 모유수유와 젖병수유 사이에 피부 접촉의 한계 외에 차이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일까요?


분석가 : 첫 번째는 공격성의 한계요, 두 번째는 환상의 한계입니다. 공격성의 한계라는 것은 어머니의 젖을 물 때 아기는 어머니의 품과 젖가슴의 접촉으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면서 흥분과 함께 깨물고 싶고 마구 빨아대고 싶은 공격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젖병은 아기로 하여금 흥분과 공격성을 드러나게 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마구 공격함으로써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충동과 어머니는 그런 공격을 받으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게임이 둘 사이에서 치열하게 일어나야 하는데, 젖병은 그런 여건을 조성하는데 실패조건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상호 투사하고 전이를 일으키는 인격적 교류가 두 상황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죠. 두 번째로 언급한 ‘환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젖가슴이 제공하는 환상과 젖병이 제공하는 환상이 다를 수밖에 없겠죠.

 어머니가 제공하는 것은 젖가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아기에게 주는 것이거든요. 그때 아기는 어머니에게서 1차적 대상으로서 전(全)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니캇은 아기가 어머니를 전인격적인 사람으로 만나게 됨으로써, 유아 자신도 작으나마 전인격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존재로서 인생을 출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유수유와 피부접촉

 탐구자: 모유 수유가 황홀한 상태를 동반하게 된다고 할 때, ‘빤다’는 행위가 가진 의미 중에는 나중에 사춘기나 성인기의 성적 취향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나요? 


분석가 : 네,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위니캇은 “성적인 종류의 느낌들이 유아기의 모유 수유와 관련된 느낌들과 경쟁”({아동가족그리고 외부 세계}, 64)한다고 표현합니다. 위니캇의 이런 언급은 유아기의 모유수유 방식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이성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유사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모-아 두 사람 사이에서 피부 접촉이 얼마나 공감적으로, 그리고 밀접하게 이루어지느냐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 성적 성향을 좌우하게 되고, 이성 교제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느냐의 문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친밀감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육을 받는 동안 피부접촉에 결핍이 있는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이성이 피부 접촉을 시도해 오면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건전한 이성 교제를 위해 경계를 세워 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성을 매개로 하여 관계 중독에 쉽게 빠져들죠.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임상의사인 빌 존스(Bill Jones) 박사에 의하면 ‘가출 소녀의 90%가 접촉 결핍증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탐구자 : 젖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모유수유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때, 양육자가 정성껏 피부접촉을 충분히 하면서 젖병 수유를 하면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분석가 : 어머니가 항생제를 많이 맞아서 젖을 줄 수 없을 때, 젖병 수유를 마치 모유 수유하듯이 할 수 있다면 그런 상황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될 수 있어요. 이 경우도 일단 안아주기를 잘해 주고, 피부 접촉을 많이 해 줘야 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닌 사람이 젖병 수유를 하는 경우, 어머니만큼 모성애를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게 되면서 한계상황이 빨리 발생하게 될 겁니다. 반드시 어머니가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아기를 진정한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양육자가 필요합니다.     


스펙 때문에 모유수유를 포기해야 하는 현실

                         

탐구자 : 이런 견해도 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에게 사회적 스펙이 매우 중요해졌는데, 과연 사회적 스펙을 포기하면서까지 꼭 모유수유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견해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여성은 이 시대에 위니캇처럼 ‘모유수유를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분석가 :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여성은 자기 몸매 관리를 위해 모유수유를 포기하는 여성보다 더 이기적입니다. 먼저 그 견해 속에는 어머니로서 아기에 대한 존중이 없는 것입니다. 아기를 낳은 어머니라면, 모유수유가 옳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이 따라 주지 못해 현실을 좇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만일 여성이, 나의 사회적 스펙을 쌓아가기 위해 모유수유를 배제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폭력입니다. 부모는 현실을 논하기 이전에, 아기를 위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기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육아휴직이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분석가 : 위니캇은 첫 3년 동안 어머니가 아기를 잘 품어 주면, 그다음에는 아이로부터 되돌려 받을 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영국에서는 멜라니 클라인이나 위니캇의 정신분석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 사회 자체가 이런 육아를 위한 휴직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이 그 사회에 미친 영향이라고 봐야겠죠. 그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가 그렇습니다. 신문을 보니, 스웨덴에서 3년간 육아휴직은 산모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 3년의 육아휴직이 자유롭지 못한 것 자체가 바로 ‘사회적 폭력’입니다. 여성들이나 남성들은 건강한 자녀양육을 위해 바로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런 폭력에 저항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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