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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해야 할 보복을 아내에게 하는 남편

유아기의 투사적 동일시를 반복하는 부부관계

(이 글은 앞의 글 ['좋음'을 들이쉬고, '나쁨'을 내쉬다]와 관계있습니다)


최초의 리비도


덩어리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는 그 덩어리를 둘로 나눈다.

좋음(생명본능, 사랑)과 나쁨(죽음본능, 공격성)으로 나눈 후 어머니의 젖가슴을 둘로 나눈다.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

자신 안에 있는 나쁨의 요소, 죽음본능에 속한 파괴적인 공격성을 나쁜 젖가슴에 투사하고, 좋은 젖가슴으로부터 좋음(생명본능)을 내사한다.

구강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뉘지만, 항문으로 일어나는 일은 오로지 나쁨을 쏟아내는 일이다.

유아기 1년 또는 6개월 동안 이런 신체 본능적 일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정서적인 활동이 된다.


이때 유아를 젖가슴으로 젖을 주면서 품어주고 배설물을 처리해 주며 돌보는 어머니의 역할은 아이의 일평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어떤 어머니는 양육과정에서 마땅히 돌보며 품어줘야 함을 잘 알아 공감적인 마인드로 아이를 키워낸다.

그렇다고 모든 어머니가 그런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모성애가 부족한 어머니는 이런 과정에서 아기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로 여기면서 고요한 일상을 깨뜨리는 아이에게 화내는 것으로, 젖 수유나 기저귀 갈아주기를 유보하거나 지연하기도 한다.

아기로서는 움직이기 싫어하는 어머니의 돌봄을 기다릴 수가 없어 울음을 터뜨리면, 건강하지 못한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린 결과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타법을 경험해야 한다.


아기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 정도의 삷 밖에 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내에게 나쁨을 투사하는 남편


A라는 청년은 B라는 처녀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공주처럼 대접해 주면서 결혼에 성공했다.

대개 이렇게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저 사람이라야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다'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A는 결혼하자마자 결혼 전에 했던 아내에게 했던 약속들을 하나씩 하나씩 뒤집기 시작했다.

밤상머리에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청소가 미흡한 곳에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아내면서 지적질을 해댔다.

마치 군대 상관이 검열하듯이 아내를 관리한다.


A는 유아기에 '나쁨'을 토해내는 과정을 충분히 해 내지 못했다.

자신도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 모성애가 부족한 어머니는 자녀를 하나씩 낳을 때마다 우울했다.

어머니가 보기에 자녀는 너무 자주 젖을 달라하고,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 싸고 다니고 해도 어머니는 뒤처리를 잘 하지 못해 늘 어쩔 줄을 몰라했다.

A가 자신보다 8살 많은 누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어머니가 A에게 기저귀 채우는 것조차 귀찮아해서 여기저기 똥을 싸면 6개월도 안 되는 아이를 손으로 엉덩이를 자주 때렸다고 한다.

생후 8개월쯤 되던 어느 날, 그 누나가 학교 다녀와서 보니 A가 마루바닥에 똥을 싸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손으로 똥을 이리저리 닦는 시늉을 하더란다.

아기는 마루바닥 사이사이 똥이 스며들게 만들어 더 치우기 곤란해져 치우기에 최악의 경우를 만들어낸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어머니는 아이를 마구 패기 시작해 8살 난 딸이 이를 말려야 했다고 한다.

8개월 밖에 안 된 아이가 똥을 싼 후, 어머니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다면, 이는 기가 막힌 일이 아닌가?


그런 양육환경에서 자란 A가 어떻게 '나쁨'을 내쉬고, '좋음'을 들이쉬겠는가?


그런 A가 결혼하자 유아기에 어머니에게 투사하지 못했던 '나쁨'을 잘 간직했다가 자신의 소중한 아내에게 다 퍼붓기 시작했다.

유아기 때 먹고 싸고 토하고 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아내에게 싸고 토하고 뱉아내는 등의 투사를 한 것이다.


유아기에 어머니의 눈치를 봤던 것을 자신의 아내로 하여금 A의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했던 보복을 자신의 아내에게 해 대는 것이다.

아기 때 설사해도 어머니가 이를 소화해내지 못해 줬기 때문에 A는 아내에게 온갖 잔소리로 설사를 하는 것이다.

A는 자신의 유아기 어머니와의 관계를 그대로 아내에게 재연하는 것이다.

유아기에 어머니 눈치 안 보고 마음 놓고 뱉고 싸지 못했던 것을 아내에게 마음껏 뱉어내고 싸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사적 동일시다.


유아기에 어머니에 의해 수용받지 못했던 감정, 상처, 결핍 등을 아내에게 그대로 심어주는 것이다.

아내는 그래도 좋은 어머니 밑에서 훌륭한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남편의 이런 일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아내는,


"연애 때 그렇게 잘 해준 남편이 갑자기 이렇게 변한 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아마도 내가 아내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그런 것일 거야."


라며, 일종의 도덕적 방어로 자기 비난을 시작했다.

아울러 아내는 A의 말도 안 되는 언행에 대해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A는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을 해 대는 것인데, 아내는 남편의 말을 다 알아듣기 시작했다.

이처럼 엉뚱한 신진대사가 내면에서 일어나면서 아내는 설사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설사는 5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사이에 아내의 위 기능을 매우 취약해졌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서도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대번에 설사부터 하고 만다.

그 순간 신혼 초부터 익숙한 남편으로부터 투사적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몸이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을 하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쇠라도 씹어 먹을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가진 아내였지만, 이처럼 남편의 나쁨을 아내에게 투사하고, 똥을 싸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기 시작하면서 위 기능이 약해져 밀가루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위벽에서 점액을 분비하는 점막이 매우 얇아진 것이다.


어머니 같은 여자를 찾는 이유


청소년 남자에게


"네가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어떤 여자와 결혼하겠느냐?"


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어머니 같은 여자요"


라고 답변한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답변하는 이유는 투사적 동일시를 위함이다.

그런 답변을 하는 사람은 유아기에 어머니에게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을 어머니에게 보복할 수는 없으니, 어머니 같은 여자를 찾아 보복하겠다는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머니 같아 보여야 보복을 해도 제대로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복은 그대로 놔두면 아내는 일평생 당할 수밖에 없다.

이를 끊어내기 위해 아내는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더 이상 이해하지 말고 감정을 표현하라


나는 A의 아내인 B에게 두 가지 처방을 내려 줬다.


첫째는, 남편을 더 이상 이해해 주지 말라.

둘째는, 자신의 그때그때 감정을 표현하라


이 두 가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남편의 남성성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라


한국 여성들의 남편 이해는 정말이지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아내로서 남편을 이해해 주는 방향으로 가면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편을 이해해 주는 한, 남편은 철들 기회가 없어진다.


아내가 남편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야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보복하기 위해 아내에게 나쁨을 내뱉고 배설물 같은 언어를 싸대는 남자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나쁜 것을 주는 사람이다.


소중한 아내에게 좋음을 주지 못하고 유아기에 유보했던 '나쁨'을 아내에게 주는 것이다.

연애할 때, 그 여인이 소중했던 이유는 장차 투사적 동일시를 일으켜 어머니 대신 보복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자가 아니면 자신의 결핍이나 상처, 아픔 등의 증상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다.


물론 그것은 아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20대 30대 여성이라면, 위의 남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지금 40대 이상의 여성에게는 대체로 위에서 내가 한 말이 맞다.


이런 과정에서 부부간 투사적 동일시가 만성화된다.

그렇지만 중년이 되면 아내가 힘을 얻어 남편의 이러한 입장을 뒤집기 시작한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중년기의 이런 기회마저 놓치고 만다.


이런 여성에게 더 불행한 것은, 100세 시대에 이제 절반밖에 못 살았다는 점이다.


남편을 이해하는 데에 평생을 바치는 여성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인생을 마감하기 쉽다.

여성의 여성성 찾기는 중년기에 가장 중요한 작업인데, 이를 위해서는 남편에 대한 이해를 멈추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 감정은 곧,


Here- and- Now의 감정


이다.

남편으로 하여금 내 감정을 살피게 만들어야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아내는 '고유한 나의 삶'을 찾고, 남편으로 하여금 철들게 하는 방식이다.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

바꿔 말하면, 남자는 철들지 못하면 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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