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은 자기 존재 기원과 관련이 있다
요즘 청소년 또는 청년들의 말이 과거에 비해 매우 거칠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남자들끼리 하는 욕을 최근에는 청소녀들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찰지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중학생쯤 보이는 청소녀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 중에 욕으로 대화하는 것을 사람들이 아연실색하며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뻘 되는 노인들과 아버지 어머니 뻘 되는 중년 남성 여성들이 잔뜩 타 있는 지하철에서 여자아이들은 전혀 눈치 보지 않고 쌍욕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들의 언어가 너무 거칠어서 누구도 말리지 못한 채 누가 저 상황을 저지해 주나를 눈치 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 너희들이 주고받는 말로 인해서 언어 공해가 너무 심해! 내 귀가 터질 것 같아. 여기는 공공장소잖아? 다 너희들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들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분들이야. 상황에 맞는 언어를 사용했으면 좋겠어."
나는 나름대로 점잖게 말한다고 그렇게 해 봤다.
아이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입을 수습하고 조용해졌다.
알고 보면 마음은 순진한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욕이 무슨 뜻인 줄 모르고 상대방이 욕을 하면 나도 수준 있는 욕을 하지 않으면 진다고 생각을 하고 수준에 맞는 욕을 하면서 친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어느 중학교 남자 선생님이 아이들의 욕이 너무 심해서 욕에 대해 연구를 하고 그 연구결과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교육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고 나니 그다음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욕이 확 줄더란다.
결국 아이들은 욕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또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고받는 것 같다.
욕이 바로 특정 신체의 절편을 지시한다.
즉 욕은 부분대상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만일 부분대상관계가 아닌 전체대상관계로 넘어온다면 입에서 욕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위 사례의 남자 선생님은 학생들의 부분대상관계적 인식을 전체대상관계적 인식으로 바꿔주니까 그들의 입에서 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신 것은 아닐지라도, 아이들의 자각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하! 결국 내가 하는 욕은 나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신체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비밀스러운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은밀한 행위를 통해 내가 태어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욕은 알고 보면 내 출생의 은밀한 비밀을 공표하는 것이 되고 나 자신의 존재를 비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님의 은밀한 행위를 저주하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자각은
'욕이란 상대방을 비하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결국 그 수치감은 나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구나'
또는
'남에게 욕을 아무리 해도 왜 그 욕이 내게 되돌아오는 것 같고, 왜 내 부모를 향하는 욕이 될까?'
라는 깨달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의 욕은 일종의 정서적인 숨통인지 모른다.
어쩌면 욕이라는 것은 빡쎈 가부장적 권위에 눌려 짜부라진 상태에서 삐져나오는 살점 같은 것일 수 있겠다.
가부장적 질서로 꽉 짜인 상징계 안에 들어와 숨 막혀하는 사람의 몸의 절편(부분대상)이 상징계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욕인 것 같다.
그것은 상징계는 언어적 세계라면, 실재(the real)는 몸이기 때문이다.
몸 중에서도 상징계에 편입되지 못한 어느 절편이 언어로 표현될 때 욕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성은 상징계에 속하여 억압되지만, 항상 억압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존경받는 사회지도자가 성적 문제를 일으켰다면, 자신의 성을 완벽하게 상징계로 편입시키지 못한 것이다.
손에 밀가루 반죽을 쥔 채 꽉 짜면 반죽은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욕은 상징계와 실재가 겹치는 부분이다.
그래서 사람이 욕을 할 때 상대방의 성을 비하하는 것이지만 욕을 하면 할수록 욕한 사람이 찝찝해진다.
욕은 남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찰지게 욕을 잘한다고 해도 그 욕은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욕을 아무리 잘해도 완벽하게 상대방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자기 존재 자체를 욕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욕은 멈춰져야 한다.
욕을 멈추지 못하고 남에게 투사하는 것으로 그쳤다고 생각하면, 자신 안에 쌓이는 모멸감을 외면하는 것이다.
욕을 하면 그 욕이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체대상관계를 가졌기 때문이지만, 여전히 욕이 욕인 줄 모르거나 남에게 투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부분대상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욕은 상대방의 근친적인 관계에 대해 모멸감을 주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지만, 위의 선생님처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욕은 결국 자신을 낳은 부모를 욕하는 것임이 지각될 것이다.
그런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각자의 3세 이전의 어머니와의 근친적 관계에서 가능하다.
결국 욕을 통해 자신이 유아기에 향유하던 욕망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입을 통해 잠시 자신도 향유해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욕을 할 때는 자신의 근친적 욕망을 상대방에게 투사한 결과 상대방의 근친적 욕망을 엿보는 관음증을 드러내는 것이다.
유아기의 감당할 수 없었던 욕망을 억압하여야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는 것이지만, 중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여전히 욕을 하고 있는 사람은 유아기의 욕망을 그 나이에도 여전히 향유하고 싶은 것이다.
욕은 자신이 한때 삶을 영위하던 어머니의 자궁에 대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다.
욕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의 불안, 거절감, 불편함 등을 하소연하는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잘 품어 주지 못했던 어머니의 품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욕은 투사적 동일시에 해당한다.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욕이 이러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전체대상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 욕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5~6세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
"엄마, 나는 어디서 온 거야?"
"엄마, 아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여기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다리밑에서 주워왔다."
서양에서는,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가 놓고 간 거야."
"아기는 나무에서 열리는 거야."
아마도 아기의 그런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해 주지 못하는 것은 공통된 문화인 것 같다.
그런 것을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어머니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이의 상상력은 답변이 불가능한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실 그 상상력은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을 해석하면서, 그의 천재적인 창의성은 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기원에 대해 어머니가 엉뚱한 답변을 해 준 데서 시작했음을 언급한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알고 있지만(unthinking thought), 의식으로 알아가는 과정에서 아이는 상상력이 개발되고, 창의성이 나온다.
이런 일은 아이의 상상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상상계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상징계로 넘어오면서 실재(the real)로 남는 것이 바로 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