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 지금 분석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죄수들이 동굴과 같은 지하 거처에 살고 있습니다. 그 동굴의 입구는 태양의 빛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죄수들은 어려서부터 손발과 목까지 묶인 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고 또 앞만 내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목은 묶여있기 때문에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불빛이 높고 먼 곳에서 늘 자신들의 등 뒤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묶인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와서 세계의 실재를 직접 보게 되는 것이죠. 그 사람은 그동안 자신이 봐 왔던 것은 마치 인형극을 조정하는 사람이 있어 자기 앞에 있는 스크린에 비친 그림자만 봐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분석가 : 철학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짐작이 갑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인형극을 조정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앞에 있는 스크린만 보게 만드는 사람이 부모인 경우가 많습니다. 동굴의 비유처럼 부모가 자식을 죄수로 취급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죄를 지어서 죄수가 아니라, 진정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자기 존재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죄수의 의미입니다.
탐구자 : 그렇다면 부모는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가게 되겠군요. 그런데 자신의 재미있는 인생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자녀의 인생과 자녀의 존재를 희생시켜 버리는 것이잖아요.
분석가 :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고, 알려고 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들에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녀 간에 서로 속이고 속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이 그런 게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자녀들은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그런 게임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조차 자각하기가 힘듭니다.
탐구자 : 사람이 인생을 자기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 자각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군요.
철학자 :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낸 지식체계 또한 그렇게 구성해 왔습니다. 철학조차도 그 출발점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로 출발하였고, 존재를 논하면서도 ‘불변하는 그 무엇’을 찾으려 했습니다. 현대에 와서야 폴 리쾨르라는 철학자가 자기 정체성 이론을 정립하면서 ‘나는 무엇인가?’ 하는 동일성 측면과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기성 측면, 두 측면으로 이루어졌다는 철학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이 만들어 낸 지식 중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중요한 주제가 빠져 있었습니다.
신학자 : 베드로가 예수를 처음 만날 때,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허탕 쳤는데, 그 말씀을 듣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죠.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 5:8)
베드로의 이 고백은, 내가 지금까지 혼자 열심히 살았지만 헛살았다는 겁니다. 내 존재로 살지 못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베드로가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메시아를 그 ‘무엇’으로 파악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 16:15) 그때 베드로가 명답을 내립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 16:16)라는 고백을 하면서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으며,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분석가 : 맞습니다. 부모님들도 자녀를 그 '무엇'(what)으로 만들려면 교육에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who)의 관점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부모 자신이 자녀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자녀도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보입니다.
탐구자 : 요즘 청소년이나 청년이 되면 부모와 갈등이 첨예화되는데, 그 갈등은 서로 주장이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내가 네게 안 준 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고, 자녀 입장에서는 “엄마가 내게 해 준 게 뭐냐?”는 겁니다. 그런 견해의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인가요?
분석가 : 어머니는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자녀에게 안 해준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 입장에서는, 그건 엄마가 자기만족을 위해 해 준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죠. 자녀와 부모 간에 이런 갈등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기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부모가 제시해 주는 삶을 살아버리는 겁니다.
탐구자 : 현실적으로 어머니가 직접 챙겨주는 자녀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또는 사회 진출하는 데 있어서 유리한 것은 사실이잖아요?
분석가 :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게 문제가 되는 시점이 곧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에서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을 어머니들이 다 빼앗아 가버리는 겁니다. 어느 대학의 수업시간에 교수가 보기에 너무 늙은 학생이 한 사람 앉아있는 겁니다. 어떻게 오셨느냐니까, 아들이 아파서 대리출석하러 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란 아들이 자신의 삶에 직면하게 된다면 얼마나 잘 살아낼 것 같습니까? 너무 좋은 어머니는 자식의 인생을 삼켜 버리는 어머니입니다.
탐구자 : <성인아이>라는 용어가 있잖습니까? 그것은 아이 때에 아이답지 못하고 어른처럼 사고하고 어른처럼 행동하다가 어른이 되어서 어린아이가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너무 좋은 어머니 밑에서 자랄 경우, 성인아이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분석가 : 그렇죠. 우리나라는 입시가 교육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 즉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 할 잠재력을 키우는 시기이자 자기 정체성을 공고하게 형성해야 할 시기에 공부하느라 정체성의 주제가 유보됩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서야 사춘기를 보낸다거나 군대를 제대하고서야 사춘기를 겪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 정도면 양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서야 비로소 사춘기를 보내는 경우가 있죠. 더 심한 경우를 말해 볼까요? 2014년도 제주도의 어느 고위직공무원남자가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여고생의 신고로 체포된 적이 있죠. 국과수에서 그 사건 근처 CCTV를 정밀 분석한 결과 약 5회에 걸쳐서 그런 행위가 이루어졌고, 본인의 자백과 함께 사건은 종료되었지만, 자신의 직위는 면직 처분되었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소위 엘리트 계층의 성적인 방황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져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최근 언론에서 고발하는 권력관계로 이루어지는 성상납, 성매매, 미투 운동 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탐구자 :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닌가요?
분석가 : 그 경우에는 어쩌면 도덕성은 크게 문제가 없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크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거든요. 대개 이런 분들은 사회적 도덕의식은 매우 높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개인의 윤리에 있는 거죠. 사회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개별 존재적 차원으로 보면 본인도 사실상 잘못된 양육의 희생자인 셈이죠.
탐구자 : 그 사건을 결국 어머니 탓으로 돌리고자 하시는군요.
분석가 : ‘탓으로 돌린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그 원인을 따져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를 상기하게 될 겁니다. 그 지갑이 언제 어디까지는 내 주머니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그곳이 어디인지를 따지는 것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제의 근원을 따지는 일은 삼각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결국은 ‘어머니-아버지-나’라는 삼각관계를 말하는 거죠. 어머니가 원인이 되는 것과 아버지가 원인이 되는 것은 각각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원인이 되는 문제라고 해도 거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의 관계가 선(先) 개입되어 있으며, 아버지와의 관계 문제라고 할 때에도 이미 어머니와의 관계를 거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개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삼각도형의 관계를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삼각관계는 사회적으로, 즉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떤 공동체에서나 모든 상황에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문제입니다. 관계란 너무나도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분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분석은 곧 관계 분석이죠.
탐구자 : 그렇다면 위의 공무원의 경우는 부모와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분석가 : 그건 그 사람과 직접 대면을 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환경에서 어떤 교육적 가치 하에서 자랐는지 전혀 알 수 없죠. 그런데 그 사람의 경우 성(性)의 문제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자기 존재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하고 - 물론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지키느라 자신의 리비도를 많이 사용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의 요구가 무엇인지,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삶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겠죠. 그 사람의 어머니는 그 자녀를 통해 많은 영광을 누렸을 것이고, 본인도 사회적 성취를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척도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 공무원은 어릴 때 어머니가 시키는 공부 하느라 아이답게 놀지 못했을 것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오히려 아기 짓을 한 것입니다. 그 아기 짓이란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성적인 놀음을 아기처럼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성인아이의 개념대로 인생을 거꾸로 살게 된 것입니다.
탐구자 : 최근 PISA(OECD 국제학생평가 프로그램)의 조사에서 한국 학생들의 교육 만족도가 낮은 이유로 한국 학생들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보고와 같은 맥락에서 그 사건을 보면 이해가 쉽겠네요.
분석가 : 이런 경우의 어머니가 바로 ‘너무 좋은 어머니’인 것이죠.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가 다른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녀의 성적관리, 출결관리, 학원관리, 생활관리, 친구관리까지 다 해 주니까 자녀는 그런 어머니를 누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죠. 그래서 이런 어머니는 ‘너무 좋은 어머니’인데, 지나치게 좋은 어머니인 겁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어머니나 자녀가 뭐가 잘못되어 가는지를 점검하기란 쉽지 않은 겁니다. 그 공무원은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해서 그런 결과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 자신의 존재나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해 가려는 노력을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탐구자 : 이 사람의 경우는 어머니가 아들의 유아기 때부터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요?
분석가 : 그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나타났다는 점을 보면, 사춘기에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너무 억압적인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있죠. 그러나 보다 더 근원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유아기로 소급할 수 있죠.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나 공감적인 시선이 부족하여 아이의 존재가 어머니의 관심 밖에 있었을 경우, 그 사람은 성적으로 조숙함으로 나타나서 일찍 이성에 눈을 뜨게 될 뿐 아니라, 성적인 중립화가 잘 되지 않는 경우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