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시간과 무의식의 시간
탐구자 : 절대적 의존기에 해당하는 생후 1년 동안의 유아가 수행하는 과제는 두 가지로 설명해 주셨어요. 첫 번째 과제는 인격화이었고, 두 번째 과제는 몸과 정신의 통합이었잖아요? 생후 1년 이후의 세 번째 과제로 제시되는 것이 ‘현실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실화는 자아라는 심리적 심급의 발달과 연결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실화가 어머니와 유아 사이의 관계 안에서 어떤 형태로 일어나는가요?
분석가 : 유아와 어머니는 절대적 의존기 동안 존재가 상호분리 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그런 상태는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정상적일 때 이야기죠. 앞에서 거울반영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기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두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요.
탐구자 : 그 말씀이 납득이 잘 안 가는데, 그게 바로 두 존재가 융합된 상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씀이죠?
분석가 : 그렇습니다. 생후 첫 1년 동안의 절대적 의존기를 벗어나 1년이 넘어가면서 상대적 의존기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제 아기와 어머니는 존재론적으로 상호 분리되어야 합니다. 절대적 의존기 동안에 어머니와 유아 사이에는 환상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환상이 바로 현실이 아기의 존재 안으로 직접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는 방어역할을 아주 기가 막히게 하는 겁니다.
절대적 의존기의 아기는 통합되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물러 있어야 하듯이, 아기에게는 이 환상의 영역이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보장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의 제공과 공감적 마인드가 큰 역할을 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통합되지 않은 상태, 그리고 환상의 영역을 충분히 누리는 아기는 나중에 창조성을 발휘하는데 무리가 없게 됩니다. 이 환상의 영역이 방어하는 것은 바로 외부 세계의 현실입니다.
탐구자 : 1년 전후의 아기는 아직 현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는 말씀인군요. 만일 현실이 환상을 밀어내고 들어와 버리면 어떻게 되는거죠?
분석가 : 생후 1년 전후의 아기에게는 아직 현실이 확 들어오면 안 됩니다. 환상의 영역에 현실이 마구 들어와 버리면 아기는 자신의 존재가 발가벗겨지게 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기는 '현실 모독'을 당하게 됩니다. '현실 모독'이란 아직 존재가 자라지 않았는데 현실이 들어와서 존재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자발성과 창조성의 발현을 막게 되면서 삶 속에서의 생생한 느낌, 몸의 생기발랄함 등을 다 상실하게 되는 겁니다.
탐구자 : 장차 현실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환상 영역에 머무는 동안 충분히 무능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군요. 성급한 어머니들은 바로 이 시기에 아이의 지능을 개발해야 한다면서 플래시 카드를 돌리는 등 조기 교육을 하던데 그건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분석가 : 그 시기는 지능을 논해서는 안 되는 시기입니다. 현실이 환상 안으로 들어올 때는 스며들 듯이 서서히 들어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위니캇은 환상과 현실 사이에는 중간영역이 있고, 중간현상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환상이 작용하지만, 절대적 의존기의 환상과는 좀 다릅니다. 위니캇이 인간 본성을 진술할 때 내적실재와 외적현실 이외에도 또 하나의 진술, 즉 제 3의 영역에 관한 진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피력한 적이 있습니다.
절대적 의존기 동안, 유아는 현실 앞에서 절대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머물러 왔습니다. 이러한 무능한 상태에서도 앞으로의 삶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바로 이 환상의 영역이었습니다. 상대적 의존기에 들어서게 되면, 이제 제 3의 영역, 중간영역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탐구자 :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간다는 것이 나름대로 복잡한 과정을 겪어 가는 것이군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기는 알아서 저절로 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분석가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의 한 분야인 대상관계 이론의 역할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잊혀 진 시간을 회상케 하고, 수축된 시간을 길게 이완시키고, 덩어리 시간을 분절해 가는 가운데, 신화적인 시간을 역사적 시간으로 만들어 내고, 이런 과정에서 무의식의 세계에 이야기(narrative)가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작업들은, 단순히 길게 늘어져 있기만 했던 인생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분절하여 특화된 포인트를 남기는 것입니다.
탐구자 : 그렇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성과가 뭘까요?
분석가 : 현재 시간에서 영위해 가는 내 삶이 과거에 매이지 않게 되고, 미래를 기획하는 데에 걸림돌이 없게 되는 것이 바로 대상관계 이론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시간이 미래의 시간에 작동하지 않게 되고, 개인의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일관된 체계 안에서 역사와 현실과 기대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시간입니다.
탐구자 : 의식의 시간 외에 또 다른 시간이 있나요?
분석가 : 의식의 시간이라는 것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자, 동시에 과거-현재-미래 구분이 확실한 시간입니다. 이에 반해, 무의식의 시간은 시간의 흐름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가 마구 섞여 있는 시간, 하나의 통으로 인식되는 시간, 때로는 복잡한 상황이 하나의 단면으로 인식되는 시간, 때로는 한 순간과 영원이 연결되는 시간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관계적 시간이자 심리적 시간, 그리고 영혼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의식적 시간은 시계 바늘이 가르키는 시간에 불과하지만, 무의식적 시간은 표면적인 시간 이면에 영원이라는 깊은 심연을 가진 시간이 될 수도 있죠.
탐구자 : 그 말씀을 들으니 제가 본 <또 오해영> 이라는 TV 드라마에서,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보는 혼란을 겪는 남자 주인공에게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의미였어요.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이미 영원의 시간에 들어간 각자가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것이다’는 대사입니다.
분석가 :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의식의 시간 따로, 무의식의 시간 따로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시간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무의식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앞으로 중간영역을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중간영역이란 어머니와 유아 사이, 그리고 현실과 환상 사이를 말합니다. 둘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에 하나의 중요한 사물이 유아에게 의미 있게 등장하게 되는데, 이 사물이 바로 ‘중간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