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어머니 사랑을 짐 지는 자녀(1)

어머니 요소와 자녀의 존재 요소가 뒤섞인 삶

어머니 요소와 자녀의 존재요소


자녀가 사춘기쯤 되면 다음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다.


어머니 왈,

  

   "내가 너한테 안 해 준 게 뭐가 있니?


자녀 왈,


   "엄마가 나한테 해 준 게 뭔데요?"


이런 어머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준 적이 없고, 어머니가 좋은 것이라 여겼던 것을 자녀에게 준 것이다. 

자녀 입장에서는 내게 필요한 것, 내게 좋은 것을 준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주고 싶은 것을 준 것이니까 자녀의 마음속에 접수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어머니는 속이 터질 일이지만, 그나마 이런 주장을 하는 자녀는 건강한 것이다.


문제는 어머니가 좋다 여기는 것을 받은 아이가 자신의 향한 어머니의 욕망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상황에 처한 자녀의 경우에 있다.


이 두 자녀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자는 어머니 요소와 자녀의 존재에 속하는 요소가 상호 겹쳤기 때문에 자녀가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즉 자녀 안에서 작동하는 어머니의 요소가 '자아이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후자는 어머니 요소와 자녀의 존재에 속하는 요소가 상호 겹쳐 있지만 자녀는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후자 경우의 자녀는 어머니가 주기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긴다. 

그래서 그런 자녀는 자아 안에 들어온 어머니 요인을 수용하게 되면서 자신의 성격으로 인격으로 자아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되고 어머니의 욕망을 자아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 경우 자녀의 자아 안에서 작동하는 어머니의 요소가 '자아동조적'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너무 좋음을 거절하는 자녀


이 제목은 자칫 오해할 소지를 남기는 것 같다.

어머니의 너무 좋음은 어머니 자신이 좋다고 여기지만, 자녀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우의 좋음이다. 

어머니의 이러한 좋음을 거절할 수 있는 자녀라면 매우 건강하다.

그런 자녀는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를 가지고 이 땅 위에 자기의 존재 요소만을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세워보겠다고 애쓰는 것이다.

부모가 볼 때 취약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고유함을 세워나가는 즐거움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춘기를 지내는 청소년이라면 마땅히 이런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런 청소년의 당면 목표는 아동기에 이상화하였던 부성과 모성을 극복하고 자기 안에 있는 존재 요소를 끄집어내어 부모와 구별된 자아를 세워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자녀는 아동기에 부모를 5미터 거인처럼 이상화 대상으로 삼았던 적이 있었다. 

아이는 5살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가 각자가 해결하지 않고 넘어온 문제들을 이미 다 물려받았다. 

아동기에는 모를 수 있지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로부터 받은 병리적 요소를 떨쳐 버리고 싶은 '나만의 고유한 존재 욕망'이 올라온다. 

부모가 좋은 것이라고 자녀에게 줬던 것을 질 살펴보니 자신 안에 증상과 병리와 상처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자기 존재 안에 둘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면서 자신의 고유함에서 분리하여 부모에게 투사한다.

이것이 청소년기의 반항으로, 좀 심한 경우는 일탈로 나타난다.

 

어머니 사랑을 짐으로 지는 자녀


사람들은 요즘 20대 남녀를 이대남 이대녀라고 부른다.

이대남 이대녀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이대남 이대녀들은 서로에게서 결혼을 위한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기피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짙어가고 있다.

그들에게 결혼은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으로 전락했고 연애는 결혼을 위한 예비과목이 아니라 결혼을 대신할 수 있는 대체과목이 되었다. 

남성은 여성을 혐오하고, 여성은 남성을 혐오하는 현상이 지금 어느 세대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성에 대해 관계적 호기심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아마도 지금 20대만큼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대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받은 세대가 왜 서로를 혐오하는 것일까?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 이대남이대녀에게는 짐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은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나는 그런 사랑을 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일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이 남녀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이란 받은 만큼 베풀게 되어 있는데, 이들이 받은 사랑은 왜 짐으로 다가오는가?

부모는 자녀를 존재로 사랑하기보다 부모의 욕망을 대신 채워 줄 대상으로 봐 왔기 때문이다. 

부모의 그런 사랑은 절대 순수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일종의 변질된 사랑이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 목표를 세워 주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항목들, 학습진도도 다 짜준다. 

특히 어머니가 그렇다. 

그리하여 자녀는 자기 존재의 고유한 요소를 어머니 요소가 뒤덮어 버린 것이다. 


이 둘이 뒤섞여 자아동조적이 된 자녀의 삶의 어느 부분이 자신의 고유한 것인지 어머니로부터 온 것인지 구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녀를 사로잡아 아이의 존재를 삼켜 버린 결과이다.

20대가 되면 명문대를 다니는 것으로 어머니의 욕망과 그 욕망으로 실현된 자녀의 사회적 성공의 시작을 알린다. 

그런 사회적 성공은 자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것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런 사회적 성공은 약 20년간 지속된다.

사회적 성공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40대 초반이면 그런 자녀는 방황하기 시작한다. 

자녀는 한 번도 자기 존재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방황은 존재론적 방황이다. 

지금 20대라면 평균수명이 120세가 되는데, 20년의 영광을 누린 끝에 80년을 존재론적 방황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더쇼크(5): 누구에게나 모성원형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