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유령세계
탐구자 : 한 가정에서 아기가 자란다는 것은 매우 복잡한 관계 경험을 하면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군요.
분석가 :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 경험을 통해 내면적인 건강함과 정서적으로 관계 맺는 능력, 그리고 향후 삶의 질을 좌우하게 되는 잠재력 발휘 여부 등에 대한 심리적 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그 관계 경험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상징화 능력을 획득하느냐 못하느냐 의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세상에서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게 되어서 늘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계산만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관계조차도 계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경향을 가집니다. 심지어 배우자를 택하는 과정에서도 상대방을 사랑하느냐는 관점보다 계산이 먼저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혼수 때문에 혼인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죠.
IMF 때 직장을 잃었다고 이혼당하는 가장들이 수없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도 가정이 사랑의 힘으로 영위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구체적인 계산으로 굴러갔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쫓겨난 남편은 더 이상 가장으로서 효용성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당하면서 가족의 일원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철학자 : 가정에서의 그런 문제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 가정이 가치판단과 사실판단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잘 유지하면서 살아가느냐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치판단은 주관적인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입니다. 각각의 개인은 자신만의 가치관과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 정치, 종교 등 여러 가지 영역에서 개인의 행동과 판단을 이끌어냅니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에서 가치판단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가족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을 중시하여 가족의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가치판단은 개인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실 판단은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판단입니다. 사실 판단은 주로 과학, 수학 등과 같은 학문적인 영역에서 사용되며, 과학적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의 관계에서 사실 판단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족의 유사점을 기반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가족 구성원은 피부색, 혈액형, DNA 등의 유전자적 특징들을 공유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실 판단은 주로 관찰과 측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객관성과 합리성을 추구합니다.
이처럼 가족 간에 사실판단을 하면서도 합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관계에서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상호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IMF라는 위기 상황에서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여지가 없이 남편을 돈을 벌어오는 기계로만 보고 가장으로서의 가치를 산술적 계산에 국한하는 사실판단에 그쳤다면 그 가족 구성원은 처음부터 '존재로 살아본 적이 없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석가 : 그렇습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존재 자체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외양이 중요할 수도 있고, 외양에 따라 대접이 달라질 수 있다고 쳐도, 가족만큼은 외양이 아닌 존재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족관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존중받는 이유는 아버지로서 함께 ‘있음(being)’으로써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와서, 또는 아버지가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아버지가 힘이 있어서 존중받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자녀가 부모님께 사랑받는 이유가 공부를 잘해서, 특출한 능력이 돋보여서, 인물이 남다르게 잘 생겨서, 남들보다 똑똑해서 등의 이유가 아니라, 그냥 자녀로서 ‘있음(being)’으로써 사랑받는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있음'이 바로 '존재'입니다.
탐구자 : 말씀을 들어보니 ‘있음’으로 살기가 매우 당연한 이야기인데, 오늘날 가정에서는 가장 힘든 일이 되어 버린 것이군요.
분석가 :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데에는 상징화 능력의 부재가 이유 중의 하나로 꼽힐 수 있습니다. 상징화 능력 회복을 위해서는, 세상이 보여주는 현상 이면에 있는 본질과 상징과 존재로 만나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가족이 존재로 만난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녀들이 무슨 짓을 다해도 용납이 되고, 미성숙함을 드러낼 수 있고, 방어기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아무런 수치감 없이 서로를 마주 볼 수 있고, 무능해도 괜찮고, 유아적인 환상으로 때로는 미친 짓도 할 수 있고, 부모-자녀 간의 격을 지킬 수 있는 한에서 자신의 정당한 주장을 위해 화를 낼 수도 있고, 자녀의 비정상성조차도 기다려 줄 수 있고... 등의 모양으로, 건강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존재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탐구자 : 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모는 자녀의 광증의 보증서가 되어 줄 수 있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군요.
탐구자 : 알아갈수록 오늘날 부모 노릇하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일 중간대상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될 경우에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외에도 다른 증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인 현실을 사는 경우와 정반대로 현실을 현실감 있게 살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분석가 : 중간대상 경험에 실패를 했을 때는 바로 상징이 부재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상징 자체가 없으면 놀이나 유머나 문화가 없는 상태가 되기 마련이죠. 그렇게 되면 참자기 형성이 불가능하게 되어서,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찾게 되는 길은 공상 속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공상 세계는 환상 세계와 달리 상징성이 전혀 없는 세계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공상 세계가 그 아이의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될 때는 일종의 ‘유령성격’이 되어 버립니다. 위니캇은, 실제 대상 세계의 사용을 거부한 아이는 대상들을 이용하여 하나의 특별한 내적인 공간을 구축한다고 강조합니다.
탐구자 : 요즘 좀 황당한 이야기가 많던데.... 예를 들면, 지구 안에 또 다른 지구가 있다는 설, 지구 안에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지구 공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더라고요. 또는 UFO 이야기만 계속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유령세계에 산다고 보면 되나요?
분석가 :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공상에 빠진 사람은 그런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마치 현실로 인식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들로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바로 ’ 유령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중간영역의 삶이 죽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잘 관찰해 보면 마치 죽은 자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탐구자 : 제 주변에 무협지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런 경우인가요?
분석가 : 중국의 마윈 회장은 김용의 [영웅문]이라는 무협지를 보면서 상상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무협지를 좋아한다고 해서 유령세계에 빠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간대상 경험이 없어 상징성이 부재하는 사람의 경우, 무협지에 깊이 빠지게 된다면 유령세계로 들어가는 것일 수 있죠. 꼭 무협소설이 아니더라도, 현실 대상에 애착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영역을 보유하고 있다거나, 곤충 세계에 깊이 빠져 있어서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경우, 유령놀이에 강박적으로 몰두하는 아이, 성적공상과 과도한 자위에 빠져 있는 청소년 등이 유령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 히키코모리 등을 있습니다.
탐구자 : 광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바로 유령세계에 빠져 있는 경우에 해당되겠군요.
분석가 : 그렇겠죠. 그런 사람들 중에는 이단종교에 깊이 빠져드는 경우가 있고, 이단 종교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은 현실 대상을 직면하면서 살아갈 힘이 없어서 유령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유령 세계에 들어가면 굳이 주체를 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게 되거든요. 상징화가 잘된 사람은 주체를 세우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상징화되지 못한 사람이 현실을 살아가려면 매 순간마다 주체를 애써 세워야 하는 데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령 세계로 들어가면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예 주체를 놓아 버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그 세계 안에서 사는 것을 편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