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7: 남성적 유대와 소외되는 여성성

월턴의 탐험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공포소설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 책은 다양한 측면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인간의 원죄가 무엇인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 문제가 무엇인지, 자연과 과학의 딜레마는 어떤 것인지, 근대적 사상의 한계가 무엇인지 등 굵직굵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이 단순히 공포소설에 불과했다면, 굳이 고전에 속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이 깊고 오묘한 주제들을 다뤄나갈 텐데, 독자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잘 따라왔으면 한다.

누구나 함께 따라올 수 있도록 줄거리 전개와 줄거리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밝혀가면서, 동시에 저자가 탐구하기를 원하는 지점들을 도달하기 위해 나는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참조하면서 정신분석적 관점들을 가지고 통합 나가고자 한다.


오늘의 글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 중 그 일부 다뤄 보고자 한다.


남자의 소설


이 소설은 여자가 쓴 '남자의 소설'이다.

첫 번째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근대철학의 중요한 맥락이 '절대주제주의'이다.

여성 작가인 메리 셸리는 가부장적 질서를 강하게 고착시켜 온 당시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 안에는 남자만을 절대적 주체로 여겨 온 사회에서 여성성이 어떻게 왜곡되고 어떻게 억압되며, 어떻게 폐기 처분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들이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이 소설에는 세명의 중요한 남자가 등장한다.

로버트 월턴,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괴물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박하정은 자신의 논문([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남성성의 재현과 남성 간의 유대] 2016, 근대영미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남성 중심의 남성에 관한 이야기로 보고 세 화자의 남성 관계와 더불어 서로가 맺는 유대관계에 주목하였다.


탐험가 로버트 월턴

오늘은 월턴에 대해 집중해 보자.

이 소설에서 월턴은 고독한 남자로서, 그 고독을 남성과의 유대를 통해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미리 전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월턴은 아버지 영역의 부재 또는 부실로 인하여 남성과 유대, 동성 친구를 만들어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월턴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종의 아버지 권위를 물려받는 것에 대한 실패를 이렇게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탐험 역시 바로 그런 동기에서 시작된다.

세 남자의 이야기는 여성성 이야기로 환치하고자 하지만 여성성은 곳곳에서 폐쇄된다.

누구에게나 아버지의 부재라는 것은 목표, 이상, 그리고 가치의 부재와 연결된다.


하인즈 코헛은 야망과 포부를 어머니 영역과 아버지 영역으로 구별한다.

야망(ambition)은 뭔가를 할 수 있는 몸의 상태가 되는 상태이다.

포부(idealization)는 '이상화'인데, 누군가 중요한 인물을 이상화하거나 미래의 목표와 이상을 세우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월턴은 야망은 가지고 있으나 삶의 목표를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의 사람은 대체로 여행을 즐기거나 탐험을 한다.


우리나라에도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 어머니가 묻는다.


"너 졸업하면 뭐 할래?"

"글쎄, 일단 졸업하고 나서 생각해 볼게"

그 후 다큐멘터리 PD가 되어,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는 그런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늘 생생하여 편안한 인생을 살기보다 모험가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일찍이 퇴직하고 모은 돈으로 요트를 사서 바다 위에서 세계일주 여행을 한다.


탐험을 하는 이유는, 배만 타면, 또 다른 문화, 또 다른 인종,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면서 최종적인 목표를 세우며, 작은 목표를 성취해 가면서 스스로 발전해 가고 성숙해 가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모험가로서 월턴도 마찬가지이다.

"모험가로서의 월튼의 야망은 아버지의 부재와 그를 대신한 삼촌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위 논문, 9)


탐험의 의미, 근대적 사고

제국주의 국가가 제3 국가를 식민지화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보내는 사람은 바로 탐험가이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화할 국가를 지리적으로 파악하기 위함이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이 출판된 1818년이며, 이 시기는 제국주의 초기 단계에 접어든 시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월턴의 탐험을 제국주의와 연결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탐험행위는 제국주의적 성향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탐험행위 자체가 절대주체주의를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탐험이란 자연을 객체화하고, 이용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발상에서 나온 근대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절대주체주의란, 주체가 타자를 객체화하고, 주체가 자연을 객체화하며, 남자가 여자를 객체화하고, 귀족이 서민을 객체화하며, 상사로서 부하들을 객체화하며, 유럽국가가 제3 국가를 객체화하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절대 'I - You'관계가 아닌, 'I - it'의 관계이다.

말하자면, 주체는 객체를 사물화 하고, 그 객체는 주체가 의미를 부여할 때 의미가 발생하고, 가치를 부여할 때 가치 있는 존재물이 될 수 있다.

영국인인 월턴은 사빌부인에게 대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영국사람'으로서 '교양으로 다듬어지지 못한 이곳의 환경 속에서 가장 고결한 인격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칭찬한다.([프랑켄슈타인], 미래사, 31)

하지만 그는 러시아 출신 항해 갑판장을 소개하면서, 그의 너그러움과 성실성, 그리고 꺾일 줄 모르는 용기에 대해 칭찬하지만, 다른 한편 '교육이라곤 전혀 받아 본 적이 없고' ' '무지로 인한 둔감함'을 넌지시 비난한다.(같은 책, 32)

월턴은 영국인으로서 유럽 국가가 아닌 러시아를 객체화하여 러시아 출신 갑판장을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데카르트가 주창한 주체 중심의 근대적 사고의 발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탐험가들의 보고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어떤 지역이 군사적으로 점령하기에 유리한지, 경제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현지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정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탐험의 결과는 종종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목표를 위해 사용되었고, 종종 현지인들의 권리와 복지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탐험가들이 수집한 정보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전략적 우위를 제공했으며, 이는 종종 현지인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월턴의 탐험은 제국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있는 탐험은 아니다.

그렇지만 근대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소설 전체의 내용이 여러 측면에서 근대적 사고의 폐해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 중심으로 주체화함


여성과의 관계성 부재

월턴은 사빌부인에게 네 편의 편지를 보내지만, 사빌부인으로부터 오는 답장이 없다.

그것은 여성과의 관계가 소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빌 부인은 월턴의 누이로서 아버지와 삼촌이 부재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훈육과 교육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위 논몬, 9~10)

"야생의 자연을 탐험하고 개척하는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연을 남성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고 그 비밀이 드러나는 여성적 존재로 간주하는 당시의 제국주의적, 남성 중심적 사고와도 맞닿아 있다."(같은 논문, 10)


아버지의 권위를 배워 사회적으로 현실적 위치를 확보하고 안정감 있게 살아가는 건강한 정서를 가진 남성이 아니라, 객체화된 미지의 여성적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정복하고자 하는 정복자 욕망은 남성적 욕망이다.

거기다가 계급적, 인종적 차별까지 정당화해 가는 절대주체의 자리에 있는 월턴이다.

그것은 월턴만의 문제가 아니다.

속 내용을 서술해 가는 프랑켄슈타인 역시 여성보다는 남성의 세계를 선호한다.

이 소설은 저자가 바로 남성 중심의 사고를 고발하는 것이며, 남성주체에 의해 여성성이 억압되고 무시되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고발하는 소설이다.


친구의 조건

월턴은 외로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그는 그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대상으로 여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없다'라고 하소연한다.

그가 원하는 친구는 다음과 같다.


"내가 성공에 열광할 때 같이 기뻐해 줄 사람도 내가 낙심해서 괴로워할 때 나를 격려해 줄 사람도 없어."


월턴은 친구로서 자신과 동등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원한다.

그는 절대 여자는 친구가 될 수가 없고, 러시아인도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오직 같은 유럽인, 같은 영국인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켄슈타인도 남성의 세계를 선호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보통의 남자라면 여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형태로 자신의 유전자를 영원히 보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여성과 전혀 관계없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데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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