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 빅터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해 그의 막내 동생 윌리엄이 살해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소식에 깊은 슬픔에 잠긴 빅터는 고향인 제네바로 서둘러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제네바로 돌아가는 길에, 나(빅터 프랑켄슈타인)는 폭풍우 치는 밤에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이 순간, 나는 괴물이 동생의 살인범일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그는 괴물이 윌리엄을 살해했고, 그 결과로 인해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느끼며 괴로워한다.
내가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나의 가족은 윌리엄의 죽음으로 인해 큰 슬픔에 빠져 있다.
윌리엄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정부인 저스틴 모럴이 윌리엄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던 것이 발견되고, 그녀가 살인범으로 오해받게 된다.
저스틴은 결국 잘못된 증거로 인해 살인 혐의로 기소되고, 불행하게도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장에서 나는 나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들에 대해 깊은 죄책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나 자신이 창조한 괴물 때문에 무고한 동생이 죽고, 저스틴이 불공평하게 처벌받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의 비밀을 가족과 공유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겪는 내면적 고통과 싸우게 된다.
제7장은 빅터와 그의 가족이 겪는 비극과 괴물의 행동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보여주며, 책임과 윤리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피조물 괴물과 자연
"프랑켄슈타인" 제7장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동생 윌리엄의 살해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진 후, 자연 속에서 일정 부분 위안을 찾는다.
빅터의 내면적 고통과 자연이 제공하는 치유적 힘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막내동생 윌리엄의 비극적인 죽음의 소식은 빅터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그는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헤매며, 그 어떤 인간적 위로도 그의 아픔을 달래줄 수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가 슬픔에 잠긴 채 자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뜻밖의 위안을 발견하게 된다.
산의 장엄한 풍경과 맑은 공기는 그의 상처받은 영혼에 잠시나마 평온을 선사했다.
빅터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잊고, 인간의 슬픔이 자연의 영원한 순환 앞에서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순간, 자연은 그에게 강력한 치유자가 되어 주었다.
비록 이 위안이 임시적일지라도, 자연은 그에게 잃어버린 평화의 조각을 되찾아주는 소중한 순간을 선물했다.
호수를 바라보았다. 물은 고요했고 주변도 더없이 평화로웠다. 눈 덮인 산맥, 그 '자연의 궁전'은 변한 게 없었다. 고요한 그 풍경이 서서히 내게 힘을 주었고 나는 다시 제네바로 출발했다.(7장)
빅터에게 있어 자연은 어떤 것이었나?
자연은 여성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저자는 2장에서 엘리자베스를 자연과 일치시키는 표현을 하며, 빅터는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대비시킨다.
엘리자베스가 좀 더 조용하고 집중하는 편이었다면, 나는 좀 더 활발하고 집요했으며, 지식을 갈구하며 깊이 파고드는 쪽이었다., 그녀는 시인들의 시 낭송회를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우리 스위스 집을 둘러싼 웅장하고 경이로운 장관 - 장엄한 산맥의 위용, 계절의 변화, 폭풍우와 잔잔함, 침묵의 겨울, 그리고 생기와 기백이 넘치는 알프스의 여름 - 속에서 넘쳐 오르는 감탄과 기쁨의 배출구를 찾았다. 엘리자베스가 진지하고 흡족하게 장엄한 자연의 겉모습을 감상하는 동안 나는 그 원인을 탐구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나에게 세계란 밝혀내고 싶은 하나의 비밀이었다. 호기심, 숨겨진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기 위한 부단한 연구, 드디어 그 법칙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의 날아갈 듯한 기쁨, 이런 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감정들이다.(2장)
10장에서도 빅터는 몽탕베르 정상에 올라 자연경관에 충격과 환희와 기쁨을 얻는다.
서서히 움직이는 엄청난 빙하의 장관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다음 순간 순수한 환희가 밀려오더니 내 영혼은 날개를 달고 흐릿한 세상을 박차고 빛과 기쁨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두려울 만큼 늠름한 자연의 위용은 항상 나를 엄숙하게 만들었고 덧없는 근심들을 잊게 해 주었다. 나는 길잡이 없이 혼자 가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고독한 장관을 망칠 것 같아서였다.
자연의 법칙을 깨뜨려 생명을 창조한 창조자 빅터가 피조물의 폭력의 희생자가 된 윌리암을 잃고 위로받은 곳은 바로 자연이다.
빅터가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내적 변화와 감정의 순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독자로 하여금 빅터의 심리적 여정과 자연의 치유력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자연의 세밀한 묘사와 빅터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이 장면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할 수 있다.
고독과 적막
자연법칙의 기본을 범해 버린 빅터로서는 괴물의 외모나 그의 행적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자연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내면의 자연을 치유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의 숭고한 광경을 목격함으로써 가능하다.
내면의 자연(nature)은 곧 본성(nature)이다.
본성에 대한 성찰과 회복을 위해 자연 속에서 고립되는 고독이 필요하다.
이 소설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속하는 창조를 감행함으로써 자연의 법칙을 훼손한 죄악과 그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책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자연을 훼손한 인간의 폭력적 본성에 대한 회복은 곧 자연이다.
데카르트의 적막 : 근대철학의 자궁
데카르트의 [성찰]을 보면 그가 근대적 사유를 탄생시키기 위해 '적막함'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다.
적막함 속에서의 침묵과 고독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에. 더깊이 집중하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탐구는 '적막함' 속에서 탄생하였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주체를 유일한 중심축으로 삼으면서 객체인 자연을 개발하는 논리를 창출한다.
데카르트가 적막함 속에서 자연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주체철학을 만들어 유럽 세계를 '발달'이라는 상승궤도에 진입시켜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까지 이르러 '이성적 주체'로 끊임없이 주체 강자와 객체 약자를 약탈하고 개발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냈다.
적막함에서 시작된 주체철학이 아우슈비츠에 대한 반성이 나오기까지 400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월턴의 고독과 적막(편지 2)
월턴은 벗 없음의 비통함에 사무쳐 있는 사람이다.
월턴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은 '독학'으로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4세가 될 때까지 교육과정을 혼자 대충 훑다시피 했고, 토머스 삼촌의 항해서적 외에는 읽은 책이 없었다.
그는 많이 생각하고 웅대한 꿈을 키워왔지만 지성과 감성의 균형, 지식들 사이의 조화가 부족했다.
월턴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세계를 경험하여 견문을 넓히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북극을 여행하는 것도 인격의 불균형성 때문일 수 있다.
월턴의 인격 불균형성은 사회적 관계성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월턴이 만나는 중요한 사람은 또 하나의 인격 불균형성을 가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빅터의 존재와 그의 삶 그리고 그의 기괴한 괴물을 만들게 되는 스토리는 곧 월턴 자신의 내면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월턴은 빅터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흡수하여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소설 중의 두 인물의 기괴한 내면세계는 곧 작가의 내면 세계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은 이 소설을 읽어 가는 .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러한 주제는 나중의 글에서 다뤄질 것이다.
월턴의 벗 없음의 고독과 적막은 빅터의 고독과 적막과 맞닿아 있다.
빅터의 고독과 적막
이 소설에서 '적막함'은 주요 인물들의 고립과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 억압과 절망 등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실험과 창조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적 연결과 소통을 제한하여 삶의 여러 측면에서 겪는 감정과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메리 셸리가 제시하는 적막함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프랑켄슈타인의 고립과 내면세계, 그리고 데카르트적 사유와 관련된 의문과 탐구를 나타내며, 이를 통해 작가는 현대적인 사유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갱생해보고자 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때 적막한 집에서 몇 년을 보낸 것이 있다."(4장)
여기서 '적막한 집'은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고립되어 살아가는 장소를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적막한 집'은 프랑켄슈타인의 내면세계를 반영하기도 하다.
그 자신과의 내적 대화와 소통을 통해 자아를 탐색하고 이해하려는 프로세스에서 '적막함'은 자아의 고립과 무력함을 상징한다.
이는 데카르트의 사유 작업과도 관련이 있으며, 모든 것을 의심하고 소통 없는 고립된 환경에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나타낸다.
둘째, 빅터가 '적막한 집'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고립된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괴한 괴물을 만들어낸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반성이며, 그 회복은 자연의 적막함 속에 들어감으로써 자연에 대한 회복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메리 셸리의 적막과 자연은 데카르트의 개발대상으로만 가치를 가진 자연과 그 훼손에 대한 반성이자 회복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의 '적막함'은 한편으로는 프랑켄슈타인의 고립과 내면세계, 그리고 데카르트적 사유와 관련된 의문과 탐구를 나타내며, 다른 한편 이를 통해 작가는 과학시대로 진입해 살아가는 근대인의 새로운 근대적인 사유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