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남자보다 9배 더 즐겁다
제우스와 헤라 간의 끝없는 논쟁
테레아시아스의 증언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올림푸스의 주인인 제우스와 헤라 간에 비슷한 논쟁이 붙었다.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하면 누가 더 즐거운가?’ 하는 주제의 논쟁이었다. 각자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각자 자기가 손해란다. 각자 자기 성으로만 살기 때문에 상대의 성이 어떠한지 알 리가 없다. 그래서 둘은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을 다 살아본 테레아시아스를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다.
테레아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나오는 유명한 예언자로서 유일하게 양성을 다 살아본 사람이다. 하루는 테레아시아스가 펠레포네소스의 킬레네 산에서 교미를 하는 한쌍의 뱀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지팡이로 둘을 갈라놓았다. 이를 지켜본 헤라가 테레아시아스를 저주하여 더 이상 남자로 살지 못하도록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테레아시아스는 약 7년 동안 여자로 살면서 결혼까지 하며 딸까지 낳았다.
테레아시아스는 여자로 산 지 7년이 지날 때쯤 7년 전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쳤다. 그는 교미하는 뱀 한 쌍을 목격했지만, 이번에는 못 본 척 그냥 지나갔다. 그랬더니 헤라가 건 저주가 풀려 다시 남자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우스와 헤라는 테레아시아스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은 남자로도 여자로도 살아 봤으니, 성관계를 할 때 누가 더 즐거운지를 알려달라”라고 요청했다.
그때 테레아시아스는 이렇게 답한다.
“남녀의 쾌감을 합친 것이 10이라면, 그중 남자가 느끼는 것은 1에 불과합니다.”
성관계할 때 남자보다 여자가 아홉 배 더 즐겁다는 말이다. 논쟁에서 패배한 헤라는 분개하며 테레아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제우스는 신의 저주를 거스를 수 없는 올림푸스의 원칙에 따라 테레아시아스에게 예언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남보다 7배의 수명을 줬다.
(출처 ; 위키백과, 테이레시아스는 교미하는 뱀을 때리고 여자가 되었다. 1690년경 요한 울리히 크라우스의 판화)
그래서 테레아시아스는 테베에서 유명한 예언자가 된다. 그는 신화 이야기 중 이곳저곳에서 자주 나타나는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에도 등장한다. 테레아시아스는 테베가 저주를 받는 이유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사람 때문이라고 예언을 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에게
“이 도시를 죄악으로 오염시킨 그 범죄의 장본인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답변한다.
테리 아시아 스는 나르시수스 신화에서도 등장하여 나르시수스의 운명을 예언한다. 그는 또한 시대를 초월하는 예언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단테의 <신곡>에서도 등장하여 유명세를 자랑한다. <신곡>에서 테레아시아스는 천기를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지옥에 떨어져 있다고 한다. 단테가 현대를 살면서 <신곡>을 썼다면,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될 뻔했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날 ‘트랜스젠더의 원조’라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할 판이다.
이처럼 테레아시아스는 절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 나는 남자로도 살아보고 여자로도 살아본 테레아시아스가 말한 양성의 진실이 지닌 현실적 의미를 파헤쳐보고자 한다.
9배 성적 즐거움은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몸과 정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의 9배의 성적 즐거움(몸)은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정신)을 불러온다. 여자가 어릴 때부터 히스테리화 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9배의 성적 즐거움에 있다. 여자가 몸을 어릴 때부터 본성대로 열어가면 또래 남자와는 엄청난 심리적 불균형을 겪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몸을 히스테리화 하여 어릴 때부터 자기 능력의 9배를 숨겨 남자가 가진 1의 능력만큼만 사용한다.
여성의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을 힘들게 할 수 있는 기능을 발휘한다. 그 결과 여성은 늘 억울하다. 어릴 때부터 여자라고 무시당하고, 여성적 본성대로 수동적으로 살고, 자기주장을 그때그때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하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연출하는 남편의 엉뚱한 행동에 대해 확실하게 자기 입장을 표현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억울함을 일평생 품고 살아올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이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여자가 ‘내가 누구인지’을 알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여자가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성을 억압하고(히스테리의 결과이다) 모성성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이 모성성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돌봐주기를 요구하는 대상에게 다 발휘하고자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보다 9배 더 사랑한다’는 말은 여자가 남자보다 9배 더 억울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여자는 뭐가 그렇게 억울한가? 여자는 결혼하고서도 억울하다. 결혼생활에서도 여자는 남편에게 9배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9배의 모성성으로 발휘하는 것으로 대신하기 때문에 또 억울하다. 9배의 모성성으로 남편의 복지를 담당해 왔지만, 여자가 되돌려 받는 것은 남편으로부터 기껏 많이 받아봐야 1의 사랑일 뿐이다.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알아주거나,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여자는 이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언제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여자가 자신의 여자임을 더 이상 모성성에서 찾지 않고, 여성성에서 찾을 때 가능하다. 모성성을 발휘할 때는 성관계에서 9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아내가 모성성을 가지고 남편과 성관계를 하면, 온갖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부적절함이 올라온다. 모성성을 가지고 있는 한, 오르가슴을 느낄 수도 없고, 느낄 수 있다 해도 그런 즐거움을 유보한다.
여자가 여성성을 찾는 일은 중년기의 중요한 과제이다. 여자는 이 여성성을 찾을 때 비로소 9배의 성적 즐거움을 얻고, 또한 자기다움을 찾는다. 그러기 위해 중년기 여성은 지금까지의 남편과 있었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년기쯤 되면, 여성은 9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영역에는 남편의 비리로 가득 차 있다. 9배 능력으로 그동안 남편을 이해해 주고, 품어 주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고 하느라 아내의 내면을 남편의 각종 비리로 꽉 채우게 된다. 중년기는 이런 비리를 아내의 ‘지금-여기의 감정’으로 고발하는 시기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는 여성은 9배의 영역 안에 꽉 차 있는 남편의 비리로 노년기에 온갖 모양의 불행을 자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