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출발부터 다르다

나르시시즘 채워주는 대상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타고난 본성뿐 아니라 양육과정에서도 나타난다.

본성과 양육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양자 간 본성의 차이가 양육의 차이를 만든다.

거기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만들어낸 남자 중심의 권력이 개입한다.


여자의 팔루스(phallus)


우리는 너무 멀리 갈 필요 없이 조선시대만 봐도 그렇다.

조선시대에 남녀 관계의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칠거지악’(칠거지악은 본래 [공자가어]의 <공명해>편에 나온다)이 있었다.

그것은 유교 문화권에서 남편이 이혼 사유로 삼을 수 있는 아내의 일곱 가지 악이다.

그것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를) 쫓아내는 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자, 음란함에 빠진 자, 질투를 하는 자, 악질이 있는 자, 시비 걸거나 비방하는 것이 많은 자, 도둑질하는 자 등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가문의 영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유교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맹자는 가장 큰 불효로 ‘후손이 없는 것’을 들었다. 가문을 계승할 자식이 없다는 것은 매우 큰 불효에 해당한다.

유교사회에서 가문 계승자는 당연히 아들이다.

유교사회에서 남아선호 사상은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자는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기까지 했다.([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여자는 아들을 낳는 것이 존재가치를 따지는 준거점이 된다.

즉 아들을 낳으면 그 가문에서 엄마나 아들의 존재가치는 올라간다.

딸을 낳으면, 그 딸의 존재가치는 ‘무’(없음, nothing)이다.

여자는 시집가서 ‘아들’을 낳아야 비로소 존재감을 가진다.

여자가 결혼하여 딸만 계속 낳는다면, 그동안 ‘무’의 존재로 지내던 여자가 ‘악’의 표상이 된다.

그런 여자는 칠거지악이라는 틀에 넣어 그 가문에서 추방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왜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것일까?

아들을 낳는 순간, 여자는 그 가정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아들의 남근이 ‘팔루스(phallus)’로 작동하는 순간, 엄마는 그동안 자신의 결여를 채워주는 자기 남편의 남근만으로 채울 수 없는 새로운 욕망이 탄생하는 것을 경험한다.

팔루스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상황을 상정해 보자.

7명의 딸을 낳고도 가문을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해 칠거지악으로 내쫓길 판에 마지막 임신으로 아들을 낳았을 때, 그 가문에서 달라지는 여자의 위상은 누가 봐도 실감이 날 것이다.

그 아들의 남근은 그냥 생물학적 남근이 아니다. 안정감을 준다는 면에서 심리적 남근이요, 그 가문에서 여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면에서 존재론적 남근이요, 가문의 권력구조에서 여자의 위상이 달라진다는 면에서 정치적 남근이다.

그런 모든 면에서 그 남근은 그냥 남근이 아니라 팔루스가 된다.

여자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팔루스를 획득하는 것이다.

아들의 남근은 엄마의 팔루스가 된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들은 돌사진에서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아장아장 걸을 때뿐 아니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긴 여행을 시도할 때조차 엄마는 그 아들에게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이렇게 아들은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는 팔루스가 된다.


아들의 출발점, 나르시시즘과 초자아


아들은 이렇게 엄마의 나르시시즘(자기애)을 채워주고, 팔루스를 획득한 엄마의 자랑스러워하는 시선은 아들의 나르시시즘을 채운다.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나르시시즘적 시선의 교환이 일어난다.

아들만 봐도 배부르고 뿌듯해하는 엄마의 시선을 받으면서 아들은 자랑스럽게 인생을 시작한다.

이제 아들에게 아빠가 문제다.

아들이 3세쯤 되면, 아버지는 엄마와 아들 사이의 유착관계를 끊어 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은 마마보이가 된다.

아들은 엄마가 좋고 아빠는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시기에 아들은 다음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어른들은 장난스레 이 질문을 던지지만, 아들은 자신의 답변이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아들은 처음에는 ‘엄마가 좋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아빠가 좋다’로 바뀐다.

그 질문을 아들로 하여금 깊은 고뇌에 빠지게 만든다.

속으로는 엄마를 좋아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아빠를 만족시켜야 하는 이중적인 자세는 아들의 심리적 성장의 지표가 된다.

어린 아들은 거대한 성기를 가진 아빠가 질문을 하는데, 자기가 아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속마음을 계속 드러내면 마치 고추가 잘릴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낀다.

엄마도 고추가 없고, 누나도 고추가 없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는다.

이런 생각이 드는 때, 아들은 정치적 선택을 감행하면서 갑자기 ‘엄마가 좋아’에서 ‘아빠가 좋아’로 태도를 바꾼다.

아들은 아빠를 좋아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유익을 얻는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3세가 지나면서 아버지는 금지를 많이 해서 아들은 속으로 짜증 났다.


‘더 이상 엄마 살 대지 마’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이놈! 이런 것 하지 말랬지’


그동안 아들에게 아빠는 ‘이놈!’ 하는 사람이었다.

싫기만 했던 아빠가 그동안 짜증 나게 금지를 많이 했던 데에는 ‘아하!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동의가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들에게 종종 발생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학교 앞에는 온갖 재미있는 것들을 파는 잡상인들이 있다.

손이 저절로 노상에 늘려 있는 장난감을 집어 가방에 넣으려 할 때, 마음속에서 ‘이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는 아들의 내면에 초자아가 형성된 것이다.

즉 아들이 아버지의 금지를 짜증 내며 받아들였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서 양심과 도덕성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그동안 내면 안에서 일어난 고추가 잘릴까 두려워했던 그 공포가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과거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엄마 아빠가 보여주는 것만 보기로 작정한다.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운동하라면 운동하고, 책 읽으라 하면 책을 읽는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시키는 것만 잘 해내면 된다.

그래서 남자는 어느 한 부분밖에 볼 수 없다.

아들은 여기서 정서적 관계, 정서적 성장이 멈춰버리고 외부의 누군가가 요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 열심히 살아간다.

대개 남자의 정서적 수준은 성인이 되어도 5세 내지 7,8세에 머물러 있다.

칼 융은 남자의 이런 속성을 ‘영원한 소년’(puer aetna)라고 불렀다.

이 ‘영원한 소년’이 모든 남자의 문제라는 점을 기억하자. 이것이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남자의 이슈를 다루는 데에는 또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니 기다려 보자.


딸의 인생 출발점, ‘내가 왜 이런 대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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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엄마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딸은 자신을 보는 엄마 시선이 아들을 보는 시선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딸은 엄마조차 여자로서 존재론적으로 수치심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한다.

지금까지 무(無)로 살아오다가 아들을 낳음으로 팔루스를 획득했지만, 딸을 보는 순간 존재감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처럼 엄마는 딸에게 나르시시즘을 투사하지 않고, 딸도 엄마의 시선을 통해 채울 수 있는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실의에 빠진 딸은 고민이 많아진다.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바로 이 순간, 남자와 여자의 정서적 차이가 만들어진다.

아들에게 시선이 꽂힌 엄마는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들은 엄마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 된다.

그러나 딸은 다르다.

딸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어 관심 영역을 스스로 확장해 간다.

물론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엄마에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딸은 엄마가 자기를 봐주는 것도 없고, 딸을 위해 보여주는 것도 없다.

딸은 뭔가를 보기 위해 스스로 고개를 들어야 하고, 스스로 보는 방향과 시야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

어릴 때는 아들과 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중년기 이후 보여주는 차이는 매우 크다.

남자는 어느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하지만, 여자는 자기도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진다.

남자가 전체를 보는 눈을 가졌다 해도 그런 전체는 모두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남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혼 10년 차 이상이면서 40대를 넘어선 여자라면 내 말의 의미를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 정도 연차의 기혼 여성은 자기 남편이 얼마나 답답한지, 얼마나 내 말을 못 알아듣는지, 어쩜 저렇게 스스로 알아서 하지 못하고 시키는 것밖에 못 하는지, 열 마디 말을 하면 왜 남편이 기억하고 싶은 말만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은 아내를 보기를 우주를 보는 것 같고, 여자 역시 남편을 꽉 막힌 사람으로 본다.

그것은 바로 어릴 때부터 부분을 보는 시선과 전체를 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떻게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채우나?

어떤 남자가 나타나서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뻐?’하면 그것이 한편으로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 다른 한편 그 말을 믿게 된다.

그런 말을 자꾸 들으면, 처음에는 거짓말 같았던 것이 차츰 진실로 믿게 된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나의 나르시시즘을 채워준 적이 없기 때문에 일평생 나르시시즘을 채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나타나서 ‘네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면 마치 스펀지에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여자의 존재는 그 말에 쏙 빨려 들어간다.

영화[모범택시]에서 림 여사는 왕 따오지에게 총체적으로 사기를 당하고 나서도 “나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있니?”라고 묻는다.

‘아니라’는 확인받고도 림 여사는 “왕 따오지, 언젠가 우리 다시 볼 수 있니?”하며 미련을 갖는다.

자기를 특별하게 봐주던 시선에 묻혀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와 아빠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여자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찾기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찾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시선을 통해 받지 못한 나르시시즘을 채우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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